예전에는 내게 여행의 계절을 물으면 답은 늘 여름이었다. 학교 방학이나 회사 휴가 일정이 여름이었기도 하지만 다른 계절에 출발하더라도 여행지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주말에 훌쩍 떠나는 짧은 일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관광이나 휴식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목적을 갖고 떠나는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여행이 오랜 시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한정된 시간을 풍요롭게 후회 없이 쓰고 말 거다'라는 결의에 걸맞은, 뜨겁고 강렬한 계절이 여행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마도 내 첫 직장과 관련이 있다.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는 배낭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였다. 여름방학을 맞은 대학생이나 회사 연차를 최대로 길게 붙여 배낭여행을 하는 고객들은 여름 시즌에 몰렸고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이 보고 듣고 느끼길 원했다. 그리고 어쩌면 여행을 기획해주고 도와주면서 나도 그런 격렬하고 힘이 넘치는 여행을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여행은 대부분 꽃이 피는 봄부터 계획하기 마련이었는데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나는 바빠졌고 가장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나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의 최고점에 다다를수록 점점 나도 휴가에는 그런 열정적인 여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많이 걷고 보고 체험해야 했다. 3주간 서유럽 9개국을 돌기도 하고, 한 달 동안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와 동남아 5개국을 관광하기도 했다. 간혹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로 시간이 나면 하나나 두 개의 나라로 여행을 가곤 했다. 최대한 많이 보고 오는 것이 내겐 여행다운 여행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로, 휴식보다는 눈도장이나 발도장을 찍고 돌아오는 것이 제일 큰 목표였다. 그것은 국내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한도시에서 하루나 이틀을 보내며 최대한 그곳의 관광지를 많이 둘러보고 지친 몸을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고된 일정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올해 여름휴가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최근 나의 체력은 전과 같지 않아서 쉽게 피로해지고 한낮이 되면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을 받곤 했다. 여행을 위해 집을 떠난다는 것부터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으니 고된 일정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가족의 휴가 일정 직전에 전국에 물난리가 날 정도로 엄청난 비가 쏟아졌었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여전히 내리는 비에 대한 염려로 과연 여행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 또한 앞섰다. 그렇지만 휴가와 방학으로 온 가족이 9일의 시간을 공백으로 만들어 둔 상태라 집에만 머물기엔 너무도 아쉬웠다.
며칠간을 별 일 없이 집에만 머물다 시간의 공백을 무의미한 '공'으로만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더라도, 여행지에서 관광을 하지 못하더라도, 어딘가로 떠나서 그저 '밥 해 먹고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누워있다가 편히 잠 잘 잘 수 있는 시간을 보내자.'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지리산에 위치한 자연휴양림으로 떠나기로 했다. 늦은 밤 숙소만 예약을 마치고 아무 준비도 없이 다음날 아침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으니 무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었다. 지나가다가 좋은 풍광을 만나면 내려서 사진을 찍고 배가 고프면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서 그제야 메뉴를 정했다. 첫날은 유명하다는 어탕국수를 먹으며 생각보다 깔끔한 맛에 뚝배기 하나를 금세 비웠고, 잠시의 검색으로 와이너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아내고는 무작정 찾아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와이너리 안의 산책길과 와인동굴의 아름다움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와인과 수제 맥주를 구입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 와인과 함께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는 곧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둘째 날이라고 별게 있었냐 하면, 자연휴양림의 산책로를 좀 둘러보고, 근처 계곡에서 잠시 발을 담그고는 숙소에서 낮잠 자고, 책 읽고, 밥을 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셋째 날 속리산의 자연휴양림으로 옮겨갔지만 그날도 다음날도 이동 외에는 많은 활동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숲에서 쉬고 왔다는 생각을 흠뻑 하고 돌아왔다. 여행 내내 해가 떴다가도 소나기가 여러 번 왔고 우리는 그저 숙소에서 숲의 초록색을 보며 아무 고민이나 깊은 생각 없이 빈둥빈둥 지냈다. 방바닥에 누워 비가 오는 창 밖을 바라보니 문득 이런 것도 여행의 즐거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역할에 따른 의무들과 같은, 의식하지 못했던 일상의 소소한 구속들을 벗어던지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관광형이고 아이들은 여행지의 액티비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늘 무리한 일정으로 여행을 다녔는데 이번에 휴식이라는 의미의 여행을 조금은 맛보고 온 것 같다.
예전의 나에게 여름의 색을 표현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빨강이라고 답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여름을 지나며 여름의 색을 다른 색으로도 느끼게 되었다.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초록, 어쩌면 연두. 여름을 떠올리며 초록이 우거진 숲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늘 조급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태양만을 떠올렸다.
아마도 예전의 나는 경험의 축적을 위해 에너지의 소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면 지금은 시간의 흐름에 나를 내맡기고 내 안과 밖의 소란함을 잠재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필요하다. 올여름 휴가기간의 공백을 붉은색이 아닌 초록으로 채울 수 있어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다가올 가을을 더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