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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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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범인 Nov 24. 2023

범인(凡人)과 범인(犯人)

오랜만에 글을 쓰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노트북을 켰다. 요즘 피곤하다며 책도 글도 뜨개도 다 멀리하며 지냈는데 늦은 밤 혼자 있는 이 밤의 고요함은 다시 나를 이 시간과 장소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매일의 일과에 짓눌리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지내는 시간에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 테이블 위 따뜻한 백열등 빛은 차가워진 나의 마음을 데웠다. 이 시간을 헛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밤, 혼자 있는 이런 밤인데 너무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갖으려니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은 한없이 쳐지고 나의 생각은 아무 의미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아, 힘들다.

재미있는 일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소중한 밤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은데.

밤에 혼자 있으니 좋다.

밤. 그러고 보니 밤을 좀 사다가 쪄 먹을까.

밤에 밤 먹으면 살찔 텐데.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만 하면서 커서가 깜빡이는

노트북의 하얀 화면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밤과 밤이라니, 여전히 유치한 말장난만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러니 글이 나올 리가 없다고 자책을 조금 했다.

그러다 내가 쓰는 닉네임도 사실 두 가지 뜻이 있지! 내가 이 닉네임을 고른 이유와는 반대의 뜻으로 사람들은 나를 예상하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참 생각의 방향은 틀이 없이 제멋대로구나.


나는 정말 흔한 이름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성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김’씨라 어딜 가도 나랑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같은 학년에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친구가 꼭 3-4명은 있었으니까. 정말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는 남편은 평생 본인 이름과 똑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자주 만나서 그런 일이 있어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 나랑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 또 있구나, 정도.

그러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를 하고 내게도 닉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고른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의 ‘범인’이었다. 흔한 이름, 너무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냥 보통의 사람으로, 튀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존재감이 없는 것은 싫으니까 소심하게 ‘특별한 범인’으로. 이건 뭐 못생긴 사람 중에 제일 예쁜 아이 찾는 격으로.

그런데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의 닉네임을 듣는 사람들은 다들 나를 드세고 강한 캐릭터로 예상하고는 했다. 왜 그런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는 뜻의 ‘범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범인(凡人)과 범인(犯人)이라니. 너무도 상반된 단어잖아. 그런데 왠지 이 두 단어가 주는 그 간극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바라보는 내가 같지 않다는 오묘한 뜻을 담은 단어 같았다. 평범함을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들 틈에서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모순된 소망과도 닿아있기도 했다.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갈수록 내가 그 사람들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맞추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한 나는 내가 어떤 범인으로 그들에게 비추 어질지를 마음 졸이며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 혼자 마음을 다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나 짐작으로 가끔은 내가 범인(凡人)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범인(犯人)이 되기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늘 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혼자 있는 밤은 참 위험하다. 이렇게 작은 단어  씨앗으로도 수갈래의 가지를 뻗는 생각의 큰 나무를 키워내니 말이다. 나는 그 나무 아래에서 글을 쓰며 나를 찾아간다. 그리고 오늘밤에는 조금은 우울하고 힘들었던 며칠의 먼지들을 털어냈다. 먼지를 털며 생각했다. 나를 가장 웃게 하고 울게 하는 범인은 나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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