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동승
"내가 바빠서 미안한데 이것 좀 부탁해."
"매번 부탁해서 미안한데 물어볼 데가 없어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일 거 같아서 부탁해요."
직장생활 중 선한 얼굴로 다가와서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 '그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라고 칼 같이 선을 긋기에는 매정해 보일지, 평판과 소문에 대한 거북한 감정에 '이번 한 번만'이라 다짐하며 돕게 된다.
나에겐 쉬운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히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퇴근길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내가 오늘 약속 장소가 00 씨집 근처인데 퇴근길에 태워줄 수 있어요?"
"저희 집 근처이긴 하지만 저도 안 가 본길이라 제가 아는 길까지는 모셔다 드릴 수 있어요."
"아. 그거면 충분하지. 고마워요."
그렇게 그녀와의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보조석의 그녀는 운전자에 대한 예의를 졸음방지용 수다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쉬지 않고 그녀의 입에서 타인의 험담과 자신의 대응을 늘어놓았다.
"아, 여기서 우회전이야."
"네? 저는 직진해서 가야 하는데 그럼 직진 후 바로 세워드릴까요?"
"아니 아니. 우회전해서 조금만 가면 되는데 거기까지만 부탁해. 내가 바빠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 번의 우회전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후회 전, 좌회전, 직진이 몇 번 반복되었다.
"저 초행길은 운전미숙인데 집에 돌아가는 길도 잘 몰라서 인근이면 여기에 내려드려도 될까요?"
"거의 다 왔어요. 갈 때는 네비 요즘 잘 설명해주고 생각보다 길이 안 어려우니 갈 수 있어요. 내가 바빠서 부탁해요. 다음번에 내가 태워 줄 일 있으면 몇 번이고 태워드릴게."
그녀의 말에 마지막 그녀가 원하는 카페 앞까지 도착했고 되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녀는 고맙다며 커피 하나를 사 들고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어젠 너무 고마웠어요. 내가 워낙 바빠서 무리하게 부탁한 건 아닌가 몰라. 아 그리고 내 방에 전화기가 잘 안들 리더라. 자기는 전자제품 잘 아는데 고치고 싶은데 봐줄 수 있어요?"
그녀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칼을 뽑아 무 자르듯 선을 그어야 했다.
"저도 바쁩니다. 그리고 전화고장 업무는 제 업무가 아니라서 저도 모릅니다. 어제 무리하게 운전을 했더니 피곤해서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그녀는 야속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인사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제 동승자로 옆에서 내내 씹어대던 그녀의 호구 담에 나도 포함되겠지만 나도 살고 보자.
거절을 못하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만 타깃으로 잡는 그녀의 모습을 더는 받아줄 수 없었다.
사무실 게시판에 써 두고 싶다.
그녀를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