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좋아서

[마음 품고 살기 1]

by stamping ink

"은별이구나. 학교 다녀왔..."

"쾅"

"..니?"

아이가 돌아 올 시간에 맞추어 간식을 준비하던 지숙은 크게 닫히는 문소리에 말을 거두었다. 기름 넉넉히 두른 부침개는 따스할 때 준비해 주려 기름 소리 요란하게 내며 이제 막 프라이팬에 자리를 잡은 터였다. 가스레인지 불 조절 레버를 돌려 불을 끄곤 앞치마를 벗어 식탁에 걸어두었다.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식어가는 프라이팬 위의 부침개는 기름과 섞여 더 이상 먹을 순 없어 보였다.


조심스레 아이방 앞에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대한 포부와 기대가 컸던 아이였는데 또래들과의 관계가 초등학교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 근래 작은 불만들을 털어놓던 일이 종종 있었다. 지숙은 손에 묻은 것도 없는데 방문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붙인 채 손가락 박수를 쳤다. 어려서부터 긴장하면 하는 버릇 중에 하나였다.


"은별아. 간식 먹을래?"

"나가."

방안에 작은 이불로 만든 애벌레가 지숙의 눈에 보였다. 말하는 본새가 얄미워 등짝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지숙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구이고. 우리 딸.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가능한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 보았다. 사실 지숙은 그다지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동그란 애벌레를 그냥 뒀다가는 내일 아침까지도 저 형태로 누에고치가 되어있을 것이다. 꿈쩍이지 않는 애벌레를 와락 안았다. 그제야 애벌레가 꿈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말라고~ 저리 가."

애벌레의 하이톤 짜증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지숙은 물러서지 않았다.

"왜애,왜애?"

애교 섞인 지숙의 말에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민 은별이가 몸을 틀어댔다. 어쩌다 보니 자세가 엄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강보에 쌓인 아이가 되어버렸다.

"... 사실,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가는데. 애들이 나만 빼고 자기네끼리 짝을 지었어. 그래서 나는 어쩌냐고 물어보니까 너는 혼자 있는 거 신경 쓰지 않아서 혼자 앉아도 되지 않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도 속상하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럼 짝을 다시 짓자고 하면서 되려 나한테 뭐가 화낼 일이냐며 너 혼자 식당도 가고 강당에 갈 때도 우리 안 찾고 갈 때가 있어서 혼자가 좋은가 보다 했다며 미안하단 말도 안 하는 거야. 자기네가 실수했다고 하면서 왜 사과는 안 하는 건데?"

은별이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친구관계의 고민을 성적으로 따지자면 전교 1등, 아니 전국 1등 감이련만 관계의 서운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가 않은지 어깨를 들썩였다.

"애들이 일부러 그랬겠니. 은별이가 착하니까 이해해 주겠지 싶었나 보다."

아이 편에서 사춘기로 되돌아가 같이 흉이라도 봐야 아이 맘이 풀릴 텐데 어쭙잖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가 지숙은 조심스러웠다.

"됐어. 엄마는 둥글거리는 성격이라 내 맘도 모르지. 엄마는 운이 좋아서 좋은 친구들 만나서 이런 고민을 알 수 없을걸?"


'둥글다, 운이 좋다. 친구... 친구..?'

귀에 막혀 넘어가지 않는 단어가 맴돌았다.



산길 같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붉은 벽돌 주택들이 늘어서 모여있다.

좁은 골목이지만 아랫동네 윗동네 아이들은 편 가르며 대장 노릇하는 아이의 진두하여 해 저무는 줄 모르다가 엄마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각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80년대 평범하리만큼 작은 달동네 골목이었다.


평범한 동네에 평범한 아이라 생각하던 어린 햇살은 아이들과 섞여 지내는 것이 좋았다. 동네 친구들을 학교에서 스쳐 만나지는 날이면 짓궂은 남자아이의 장난에 손가락 가리켜 일러댔다. 줄행랑치는 남자아이들이 뒤꽁무니를 보고 통쾌하게 웃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다 내 편이던 그런 정 있던 동네 친구였다.


여름방학식이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의 탐구생활과 성적표가 휴지처럼 구겨진 채 가방 안에 담겼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햇살의 손에는 건강검진표가 하나 더 쥐어져 있었다. 방학 전 학교에서 실시한 건강검진 결과지 중에서 몇몇 특이사항이 있는 아이들에게 쥐어 보낸 종이에는 '안과검진 요망'이라 적혀있었다. 형제들 틈에 비집고 들여다본 한글 공부의 덕분에 글씨는 읽을 수 있었지만 글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방학 내내 뛰어다니며 살이 까맣게 타 하얀 껍질이 살살 올라오던 날, 어머니는 개학이 거의 다가옴을 알고 미루던 병원을 가려 햇살의 손을 잡았다. 동네 작은 2층에 잡은 안과에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안경점의 화려한 안경이 눈에 반짝거리며 눈길을 잡았다. 반에서 잘 사는 아이들만이 착용하고 다니던 안경을 나도 갖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부푼 마음을 가졌다. 한가한 병원에 도착하고 나이 든 의사는 낯선 기계 앞에 낮은 키 작은 햇살의 눈을 이리저리 살폈다.

"유리렌즈 끼워야겠어. 양 눈 시력 차이가 너무 나네. 그냥 두면 실명되겠는데?"

100원짜리 동전 값에도 시장에서 흥정을 하는 엄마의 표정에 입이 쩍 벌어지는 것에 안경도 렌즈도 어림없다는 것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안과에 다녀온 햇살에게 몰려들었다. 실명이란 단어의 의미도 모른 채 동네 아이들에게 안과에서의 경험담을 햇살이 늘어놓자 아이들의 관심이 한 데로 모였다. 이런 기계 저런 기계 신기하게 받은 느낌을 아이들도 옹기종기 모여 탄성과 함께 귀를 기울였다.

그날의 주인공은 햇살이었다. 말 한마디마다 아이들은 놀랐고 햇살의 입만 쳐다보았다.

"쳇. 결국 장님이 된다는 거네?"

동네에서 늘 골목대장을 하던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놀이의 중심이었던 친구였는데 아이들의 관심이 쏠리니 여간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아이들이 웅성였다 골목대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님된다는 거라고. 못 고친다고. 점점 심해진다고 하는 거 보니 옮는 거 아니야?"

햇살의 둘레에 있던 아이들이 흠칫 몸을 뒤로 뺐다. 한두 발걸음 뒷걸음치더니 귀신이라도 본 모양처럼 혼비백산하며 달려 소리쳤다.

"햇살이랑 눈 마주치면 장님이 된대~"

"햇살이 눈 보지 마~~"


철없는 친구들의 장난에 햇살은 전염병 환자가 되어버렸다. 가족처럼 친했던 친구들도 골목대장의 말에 햇살의 손을 놓고 도망쳤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햇살은 얇은 여름이불을 돌돌 말아 이불속에 몸을 숨겼다.

늦은 점심 준비로 바쁘던 어머니가 햇살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야? 더운데 왜 이불을 그리 돌돌 말고 있니?"

"애들이... 애들이... 나보고 장님이 될 거래."

억척스러운 엄마가 동네 아이들에게 당장 달려 나가 혼이라도 내주길 바라며 햇살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엄마가 고쳐줄게. 유전이라지만, 그래도 엄마가 고쳐줄게."

겨우 여덟 살 햇살은 그날 엄마의 눈물방울을 마음에 흘러 때 이른 어른 아이가 되었다.


은별이의 마음에 지숙의 눈물이 떨어졌다. 따스한 물방울에 놀라 은별이는 이불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엄마... 울어?"

"아냐 아냐. 오늘 햇살이 눈부시게 기억나서 그런 거야."

반짝이는 지숙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고이다 한 방울 두 방울 한별의 이마 위로 소나기처럼 두드린다.

2021 비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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