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주말 아침이 시작되었다. 불금이라 늦은 밤이 되도록 주중에 미뤄두었던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주말에는 늦잠을 자야지 맘을 먹었다. 하지만, 몸에 베인 습관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먹다 남아있는 재료를 들추었다. 손에 잡히는 식재료로 마땅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어서 어제 사온 크로아상을 오븐에 돌렸다. 버터의 고소한 향이 오븐의 타이머가 줄어드는 시간만큼 진하게 번졌다. 노릇노릇 구워진 크로와상 한 개와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유명한 고급 치즈 조각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주말이 되면 완독하리라 마음먹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친구와 약속이 있던 날 들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하게 1위에 있던 녀석을 집어 들어왔지만 생각만큼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크로와상이 껍질이 찢어지며 접시 위에서 쪼개졌다. 작은 조각을 입에 넣은 지숙은 바로 책을 한 장 넘겼다. 종이 끝에 손가락 따라 딸려온 버터기름이 책장에 남겨졌다. 서둘러 휴지를 뽑아 손가락을 닦고 페이지를 비벼 지워보려 했지만 이미 깊이 베어버린 기름은 종이에 작은 점을 남겼다.
"엄마, 벌써 일어났어?"
반 이상 읽기 시작했을 무렵 은별이가 방문을 열고 식탁에 소리 나게 앉았다. 밤새 꿈속에서 전쟁이라도 치렀는지 머리는 삼발이고 잠옷의 한쪽 어깨는 다 내려가 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느라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 석고대죄하는 대역죄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 보였다.
"아침 먹을래? 주말인데 왜 이리 일찍 일어났어?"
시계를 보던 지숙은 이제 막 8시가 되어가는 시간에 식빵 한 조각을 꺼내 들었다.
"아냐. 오늘 다혜 만나서 학생증 찾아와야 해. 어제 학교에서 잃어버렸는데 다혜가 교실에서 찾았다고 학원 가기 전에 잠시 만나서 돌려주겠대."
"중학생인데 학생증이 쓸모 있을 때가 있어?"
"그럼. 어디 가도 신분증이잖아. 영화 볼 때도 할인받을 수 있고 교통카드도 할인 충전이 된단 말이야."
"딸랑"
선반 가득 줄지어 세워있는 의약품들 사이로 작은 카운터가 보였다. 익숙하게 카운터 앞으로 햇살이가 다가가자 물건 정리 중이던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 언니가 테이블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포기하고 갓 시작한 사회생활 중 햇살이가 일주일에 한 번쯤 들리는 약국의 약사는 친구처럼 햇살을 맞이해주었다.
"타이레놀 벌써 다 떨어졌어?"
"네. 언니. 요즘 더 어지러워서 일할 때 글씨 보기가 힘들어서 약 먹고 나면 조금은 잘 보이더라고요."
햇살이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약사는 뒤편의 작은 상자를 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지 말고 병원을 한번 가보는 건 어때? 작은데 말고, 좀 큰 데로 가봐. 치료할 수 있는데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돼서 그래."
오늘도 어지러운 두통이 햇살을 괴롭혔다.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같은 사무실 앞에 붙여놓은 게시판의 여름휴가 기간을 빤히 바라보았다.
"햇살아. 넌 여름에 어디 갈 거야?"
사무실 능구렁이 김대리가 친근하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여기저기 동네 스피커란 별명에 걸맞게 어설프게 말을 했다간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터이다.
여름휴가가 다가오고 마땅히 갈 곳도 없던 차라 여름은 약사 언니의 조언이 떠올랐다.
"선약이 있어요."
"벌써 약속을 잡았어? 다른 과 대리들이랑 놀러 가려 했는데 여자 직원 몇 명 함께 가려고 했지."
미리 약속이 있다고 말해서 다행이었다. 분명 김대리의 입심으로 마지못해 끌려갔다간 겨울이 올 때까지 입방아에 오를 일이었다.
김대리 앞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강병원이지요? 예약을 하려고 하는데요."
전화기 넘어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서야 김대리는 햇살이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병원의 긴 대기실에 앉았다. 김대리 덕이라고 해야 하나. 햇살은 뜻하지 않았던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것은 분명했다.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렸을 때도, 고등학교 시절에 제법 큰 안과에 갔을 때도 희망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돈 벌기 시작했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으니 치료비가 많이 나가더라도 고치면 되겠구나 마음을 먹고 이름이 호명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안과 진료만 하는 근방에서는 제일 큰 병원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지만 담당의사는 햇살을 금세 불렀다. 눈을 보는 기계에 턱을 걸치게 하고는 의사는 한참을 골똘히 햇살이의 눈을 보았다.
"검사를 좀 해봐야겠는데, 오늘 시간 괜찮아요?"
햇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서 간호사는 햇살의 눈에 안약 비슷한 것을 넣었다. 따끔한 물방울은 곧 눈을 뿌옇게 번지게 했다. 그 후로는 아무리 깜빡여도 뿌연 형체들만 보여서 간호사의 팔을 잡지 않고는 이동할 수 없었다.
안과에는 이상한 기계가 참 많았다. 기계음 크게 들리는 기계에 눈을 가져가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데 물체를 보라며 짜증 섞인 간호사의 질타도 들어야 했다. 그래도 다른 방으로 이끌어주는 간호사의 팔만은 친절하게 내어주어 햇살의 마음이 간호사의 팔에 온기에 의존했다.
"마지막 검사예요."
의자에 앉아 기계에 머리를 가까이 기대었다. 앞머리가 자꾸 내려와 간호사가 햇살의 앞머리를 잡아 머리가 움직이지 않게 기계 앞으로 매섭게 밀어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앞에 있던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려서부터 눈이 안 좋았나?"
햇살은 주저하며 말을 했다.
"네. 집안 한 대에 한 명 정도 짝눈이라 하셨는데 제가 제일 심한 거 같다고 하셨어요."
"역시. 그랬군. 자. 이게 바로 홍채에 이상이 있어서 생긴 질환이라 하는 거네. 유전자 검사를 하면 더 정확하겠지만 선천적인 내용이 다수로 발생하고 홍채 안쪽을 자네들도 들여다보게. 양 눈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 상황은 이렇게 저렇게..."
의사 너머에 두어 명의 젊은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들은 햇살과 기계 사이에 눈을 마주했다. 담당의사만 있는 줄 알았던 햇살은 놀라 기계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간호사의 강한 힘에 뿌연 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의 몇 마디가 오가고 담당의사와 햇살은 기계를 옆으로 밀어 두고 마주 앉았다.
"시각장애 판정을 내려야 할 것 같은데. 신청서 가져왔나? 절차가 좀 복잡한데 안내장을 하나 주지. 그거 보고 신청하는 게 좋을 거야."
의사가 다른 의사들에게 한 말 중에 그나마 다른 눈도 문제가 될 수 있단 말만 귀에 남았다.
"선생님. 전 못 고치는 건가요?"
"이미 고칠 단계는 넘어섰네. 꾸준히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검사받으러 잊지 말고 찾아오게."
햇살의 눈은 그렇게 고칠 수 없는 병으로 마침표가 찍혔다.
의사의 권유로 햇살의 휴가 동안 장애인등록증이 생겼다. 짧은 기간, 아니면 미뤄뒀던 장애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외출을 위해 샤워를 하러 들어간 은별이 없는 틈을 타서 은별이 방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옷가지를 지숙은 집어 들었다. 언제나 방 좀 정리하라 잔소리를 해대도 꿈쩍하지 않는다.
"띵동"
이제 9시쯤 되었는데 휴일 아침에 벨을 누르는 사람이 누구일지 인터폰에 가까이 섰다. 키 작은 은별이 친구가 휴대폰을 보며 벨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다혜야. 은별이 지금 다혜 만나려고 씻는 중인데. 벌써 왔니?"
"아. 은별이 씻고 있어요? 그럼 이것 좀 전해주시겠어요?"
"은별이 학생증이네? 아무래도 이거 받으러 만난다고 했는데.."
"오늘 갑자기 아빠가 여행을 가자고 해서 학원 빠지고 강원도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얼른 전해주고 가려고요. 아빠랑 엄마가 방학 내내 학원만 다닌다고 갑자기 어젯밤에 예약해서 가게 되었어요."
"그래? 좋겠네. 이건 은별이 전해 줄 테니 재미있게 놀다 와."
다혜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부리나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내려갔다.
"누가 왔어?"
은별이 물기 톡톡 떨어지는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왔다. 다혜에게 받은 신분증을 건네며 지숙은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게 됐다고 했다.
"좋겠네. 아. 난 여름에 학원만 다니고. 에이 신분증 핑계 삼아 다혜랑 아침에 영화 한 편 보고 학원 가려고 했는데 신분증도 필요 없네."
못내 아쉬워하는 은별을 지숙은 빤히 바라봤다. 지숙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차키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