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이 끝나고 상영관이 환하게 빛이 들어오자 은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댔다. 씩씩하게 일어나는 은별과는 다르게 지숙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극장에 온 것도 오랜만이거니와 공포물은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도 보지 못하는데 은별이 기대하던 영화는 한여름 핏물 튀기는 공포물이었다. 반은 눈을 질끈 감고 반은 귀를 막아가며 영화 끝날 시간까지 버텼는데 마지막까지 영화에서 튀어 오른 핏방울이 엔딩 장면에서 사람들의 비명을 지르게 했고 지숙은 충격으로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질 못했다.
"무서웠어?"
이까짓 것이라는 표정으로 은별이 바라보았다. 지숙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이 듣질 않는다.
"아휴 놀래, 놀래.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니? 두 시간 동안 비명 천지네."
"엄마는 그렇게 무서웠으면 내 어깨 뒤에 숨기라도 하지 그랬어?"
겨울 매서운 바람이 햇살의 작은 방에도 냉기를 불어넣었다. 연말 경기가 좋아진다는 말이 뉴스에서 나와도 회사는 늘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강도 높은 업무는 계속되었다. 피로가 누적되자 햇살은 그나마 보이던 모니터 안의 작은 숫자들을 더 이상 읽어내기 어려웠다. 글씨를 크게 볼 수 있는 확대경이나 프로그램을 이용을 하기에는 주변의 시선에 당당하게 맞설 용기가 없었다.
일의 속도가 느려지고 질타가 늘어났다. 매일 발걸음만큼 무거워지는 마음인지 길가에 다 녹아가던 얼음을 밟고 소리 나게 넘어지던 날, 햇살은 품었던 사직서를 상사에게 내밀었다.
하루, 이틀은 어색하면서도 신기했다. 휴일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런 한적한 시간에 집에 있어본 적도 없었고 아침 드라마를 즐겨보는 어머니 곁에서 색이 진한 아침드라마를 시청하는 것도 어색했다. 퇴사하면 하루 종일 잠을 자봐야지 하고 다짐도 했지만 퇴사 첫날부터 계획은 일그러졌다. 늘 일어나던 그 시간에 눈이 떠지고 억지로 감아보려 해도 다시 잠은 오지 않았다.
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었던 햇살에게 평일의 휴일이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겨우 일주일 만에 다시 직장을 구하려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취업포털에 올라오는 직종 중에 어떤 것이 좋을지 찾던 중 참으로 많은 구인 모집이 뜨는 공고를 보았다.
'인터넷 회선 콜센터 확장 대모집'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으로 광고가 나오는 업체에서 대거 직원 고용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경력직도 아니지만 해보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람들을 보지 않고 음성으로만 하는 일.
그 호기심에 원서를 작성했다.
"이석이 길어. 대기콜 봐. 어서 전화 당겨."
파트장의 목소리가 고객과의 통화음 사이를 비집고 들린다. 전광판에 전화연결을 기다리는 고객의 숫자가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떠있다. 한층에 오십 명은 되는 사람들이 파티션 한 칸에 책상 위에 모니터를 보며 헤드셋을 통한 대화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하루에 채워야 할 통화량이 있었다. 일주일마다 통계를 냈고 학창 시절 전교 등수 써두 듯 벽보에 1등부터 꼴등까지 이름이 적힌 대자보가 에어컨 바람에 팔랑거렸다.
여기 생활도 1년 6개월쯤에 접어드니 벌써 중견 선배이다. 매일 신입이 들어왔다. 그만큼 매일 나가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막상 대기업 소속으로 들어왔지만 생각한 것과 다른 세상이었을 것이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콜센터 초창기였고 우리가 알던 콜센터라고는 114 뿐이었으니 사람들의 기상천외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일수였다.
열명을 묶어 관리하는 파트장은 그 위의 팀장에게 매일 조별로 성과평가를 당하고 채찍질을 해댔다. 상담 도중 남자 직원은 헤드셋을 부러트리기도 했고, 울먹이며 달려 나가는 여직원도 비일비재했다. 옥상에 마련된 흡연장소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모여있는 직원들이 많아졌고, 다시 돌아가서 업무를 하라며 옥상까지 달려오는 파트장의 벌게진 얼굴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볼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잠시 좁은 책상에 모여 파트장의 밀당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 좀 살려주라. 팀장이 지랄한단 말이야. 알지? 우리 파트만 째려보는 거? 자꾸 이석하면 자동 착석되게 시스템 만들 테니 총 이석 시간 다들 알아서 관리 해."
회사에서 지급해준 지급 품목 중 얇은 점퍼 지퍼 손잡이만 만지작거리고 한 달 정도 된 후배 두어 명만 고갯짓 하며 파트장의 회의에 적극 참여할 뿐이었다. 오전 회의가 마치면 정수기 앞으로 직원들의 줄이 늘어섰다. 모두 500미리 정도는 되는 커다란 컵을 쥐곤 가득가득 담아간다. 건물 내 공기 순환을 위해 청정기가 구석구석에서 가동되지만 발소리도 들지 않게 깔아 둔 양탄자 위의 먼지는 누군가 걸어 다닐 때마다 따라 올라온 먼지가 공중에 흩뿌려져 재채기가 올라와 수시로 물로 가라앉혀야 했다.
정수기 앞에 서서 몇 안 남은 동기가 햇살 옆에 섰다.
"햇살아. 나 그만둘까 봐. 지난주 그 진상 알지? 오늘도 날 찾을걸? 파트장은 알아서 터지라 하고 전화도 대신 안 받아준다? 경찰에 신고할까? 여기 주소 뭐냐며 찾아온다고 생지랄이야."
직원들과 뜨내기처럼 알바하는 이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다 보니 사람 사귀는 것도 쉽지 않은 곳에 그나마 마음 주고 있던 동기마저 떠나려 마음을 먹어 보였다.
햇살은 동기를 말리지 않았다. 처음 떠나는 동기 때는 모두 같이 견디자 말렸지만 우수수 떨어지며 나가는 동기들을 말려도 소용없단 것은 입사 반년도 되지 않았을 때 알아버렸다. 의료실을 따로 갖추지 않은 건물에서 직원들의 잦은 통증에 건물 외부 가정의학과와 연결되어 직원들은 줄 서서 병원 진료를 받았었고 원형탈모, 과민성 대장증후군, 두통, 치질 등 돌아가며 스트레스성 질병을 앓았다. 한참 예쁠 20대 초반에 원형탈모가 군데군데 올라와서 파마나 염색도 못하고 질끈 묶고 다니는 동기는 이러다가 옥상에서 투신이라도 할 것 같다며 마음먹은 겸 오늘 퇴사하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허무하게 동기는 떠나갔다. 햇살이 물컵에 물을 가득 담아 녹차 티백을 까서 텀블러 가득 우려낸 후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을 땐 이미 동기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업무 특성상 인수인계도 필요 없다. 그냥 자리만 내어주고 자신의 물건만 챙겨나가면 퇴사가 처리되었다. 동기의 자리엔 매뉴얼 북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모니터를 보니 동기가 떠나며 붙여놓은 쪽지가 보였다.
'나중에 전화해. 술이라도 한잔 하자.'
떠난 동기와 술 한잔 해본 적이 없다. 모두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자세를 고쳐 앉고 햇살은 모니터와 수평으로 걸려있는 거울을 보았다. 상담 시 화난 표정이나 불친절한 음성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설치해 둔 거울이었다. 내려온 앞머리를 단정하게 다시 빗어 내렸다. 화면이 켜지고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헤드셋을 고쳐 쓰고 입가로 마이크를 조정하고 인입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빠른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00 정보통신 상담사 햇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햇살의 맑고 높은음이 들렸다. 거울 속의 햇살의 얼굴은 입가에만 미소가 그려있다.
좋은 점을 찾으면 나쁘지 않은 급여조건에 정시퇴근도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일만 하면 되었다. 결재처리라든가 잡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무직 막내로 청소나 차 심부름도 없었고 어려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필요도 없었다. 감정노동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고 분하고 억울해서 밤새 우는 날도 종종 생겼지만 그래도 햇살에게는 만족스러운 직업이었다. 힘들게 하는 고객도 있지만 보람을 주는 고객도 있었다. 감사의 꽃배달이 도착하는가 하면 칭찬하는 글도 올라오고 전화 넘어 진심을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도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너무 고마워요."
"잘 몰라서 어쩌나 걱정했는데 안심이 되네요. 감사해요."
"작은 감사 표시라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화기 속에서 햇살은 또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불만만 가득한 고객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다 보면 햇살의 마음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 섞여 지숙의 손에 있던 콜라 잔을 은별이는 자연스럽게 잡아들었다. 몇 걸음 앞의 휴지통까지 가기엔 연어처럼 사람들의 인파 속을 거슬러 지나야 하는 건 곤욕이었으나 다 마신 콜라 잔을 들고 다니기는 더 불편하니 사람들 사이를 뚫어야 했다. 연신 죄송합니다를 말하며 휴지통 앞에 섰다. 그 와중에 밀치고 가거나 어깨를 치며 짧은 욕설을 하는 이도 있었다. 화가 오른 은별이는 더 거세게 휴지통 앞으로 전진했다.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 버려둔 쓰레기로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휴지통이 버티고 있었다. 등산로 앞에 돌무더기라도 쌓으며 소원을 빌듯 조심스레 종이컵을 얹어놓고 뒤로 돌았다. 분명 사람들의 인파를 한참이나 뚫고 지나왔고 휴지를 버리는 시간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는데 복도에는 덩그러니 지숙의 모습만 보였다.
"어?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좁아 보였던 복도가 순식간에 넓고 쾌적한 공간이 되었다.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는 게 인생이야."
사람들과 부딪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다가오는 은별에게 지숙은 손을 내밀었다.
"무슨 도사 같은 말을 하고 그래. 아 짜증 나."
싫은 듯 싫지 않은 듯 은별은 지숙의 손을 잡았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내려가려 줄 서있는 사람들과 섞이니 한별은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를 또 어떻게 뚫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탈지 머리가 아팠다.
"다르게 보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걸 찾지?"
맞춰보라는 듯 한별은 지숙에게 머리를 기댔다. 인파 몰리는 사람들을 보던 지숙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