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모델

[마음 품고 살기 6]

by stamping ink

"엄마 나가자."

극장 앞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은별은 엉거주춤 일어나려 했다. 요즘 인스타에도 많이 올라오는 인기 메뉴라 얼마 전부터 졸라대던 은별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가게 인테리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반짝거리는 예쁜 식기를 보고도 그냥 가자며 재촉을 해댔다. 때마침 주문을 받으러 직원이 다가왔다. 은별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지숙은 침착하게 종업원에게 사과를 하고 은별의 뒤를 쫓았다. 가게문 옆 코너를 돌자마자 은별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가버리면 어떡해."

놀란 마음을 지숙은 감추었다.

"저 언니 말이야. 우리 서클에서 제일 잘 나가는 언니였어. 그런데 옆에 남고 짱이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임신을 했단 소문이 들리더라구. 가끔 나오는 학교에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돈 뺏고 정학 맞고 가관이 아니었는데 몇 달 전에 자퇴했다고 하더라. 자퇴일지 학교에서 잘린 건지를 모르겠는데..."

"근데 도망 나올 이유가 있어? 저 아이가 괴롭혔어?"

지숙의 눈에는 단발머리 단정하게 자르고 약간 화장기 있는 종업원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숙녀티 비치기 시작한 그저 어린 소녀 같아 보였다.

"내 롤모델이었단 말이야. 짜증 나."



햇살이 상담 직렬에서 근무를 한 지도 4년 차가 다 되어갔다. 이즈음이면 승진 대상자에 거론되기도 한다. 이때까지 버티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버텼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 그만두는 것이 이 자리였다. 초록 파티션 제일 끝 관리자의 자리에 있는 파트장이 눈을 굴리며 콜 수를 체크했다. 파트장 바로 앞이 햇살의 자리가 되었다. 파트장도 건드리지 않는 이인자 자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아침 조회는 매일 일과처럼 시작되었고 이번 주에는 지난달 신입 교육을 마친 신입사원들이 두리번거리며 파트장 옆에 자리를 잡고 인사를 했다. '잘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 열심히 하겠다'라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지만 모두 저리 말하고 쉽게 떠난다는 걸 알기에 기계적으로 반김의 박수를 보냈다.


"오늘 OJT는 햇살이가 좀 해줘라."

파트장이 슬쩍 햇살의 옆에 와서 조용히 부탁을 했다.


신입사원이 되면 2주 정도 이론교육을 받고 1주 정도 콜 청취를 한 후, 마지막 1주째는 선배들의 콜을 듣기도 하고 배려 넘치는 선배는 받아보라며 한두 콜 받을 수 있는 경험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햇살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신입 업무를 주지 않았다. 옆에서 실시간 감청하듯 전화를 듣고 질문을 쏟아내면 받아주다 보면 그날 콜 수가 적어 들어 인센티브에 영향도 주었기 때문에 반기는 직원은 몇 되지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햇살에게 팀장이 귀에 속삭였다.

"미안해. 햇살 씨가 할 일이 아닌데 오늘 아름이가 무단결근을 해서 부탁할 사람이 없네. 오늘따라 우리 팀으로 신입도 제일 많이 보내기도 했지 뭐야. 햇살 씨, 도와줘서 고마워."


거절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는 이번에 새로 배정된 파트장은 배가 불룩하게 나온 막달 임산부였다. 이 자리에서 오래 남아 저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그만두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으니 쓸 수 있는 휴가도 접고 최소한의 휴가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곧 팀장이 본사로 들어가고 파트장 중에 하나가 팀장으로 승격된다는 말이 왕왕 들려오고 있었던 터였다.


"자 이거 차세요."

검은색 폭신한 스펀지가 달려있는 헤드셋을 햇살은 신입직원에게 건넸다. 몇 주 연습 삼아 헤드셋 착용을 했었을 텐데도 긴장을 했는지 신입사원은 허둥지둥 댔다. 고객에게는 친절하지만 직원끼리 까칠한 부류도 있고, 고객과 직원 모두 친절한 부류도 있고, 둘 다에게 냉랭한 부류도 존재했다. 이 직원은 운이 좋게 모두에게 친절한 햇살에게 배정받았다. 햇살은 본인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신입에게 긴장을 풀어주려 말을 건넸다.

"콜센터는 처음이세요?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제 20대 후반이 되어가요."

햇살의 친절함 때문일까 신입은 얼어있던 입을 떼었다.

"아. 저는 서른이에요. 다른 직장 다니다가 대기업 콜센터라 일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이번 기수 중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나름 서비스 직에 있었어서 자신 있다가 교육받으면서 자신감이 사라졌어요."

약간 콧소리 섞인 신입은 햇살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은지 눈치 없이 말을 끊지 않고 계속했다.

"오전 콜만 제 콜 들으실 거고요. 오후에는 저쪽 재민 씨 자리에서 듣게 되실 거예요."

하루 종일 함께 하지는 않을 거라 돌려 말해 주려 햇살은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제야 90도로 허리를 세우며 신입은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삐~~~"

헤드폰에서 알람이 울리자 이달의 멘트를 햇살을 자연스럽게 고객에게 건넸다.

"바람이 차가운 가을입니다. 곁에 함께하는 00정보통신 상담사 햇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대화는 햇살이 하고 있는데 신입이 더 긴장을 하고 있었다. 능숙하게 고객에게 호응을 해주며 프로그램에 오류 내용과 상담내역을 모니터에 입력했다. 중간중간 유선으로 해결할 상황인지 확인을 하며 공감을 이끌어나갔다. 마무리 인사로 끝을 맺고 다음 콜을 넘겨받으려 하는데 신입이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잠시 이석 버튼을 눌러 전화가 들어오지 않게 조치를 하고 신입을 보았다.

"선배. 대단해요. 방금 아저씨 엄청 화난 거 같았는데 고분고분하게 다 하자는 대로 하고 끊을 때는 고맙단 말까지 하게 하고 대단하세요."

"그저 매뉴얼의 절차대로 진행했을 뿐이에요. 오류 내용이 워낙 많아서 오류코드 정도는 외워두시는 게 신뢰감을 형성해서 상담을 부드럽게 진행할 수 있어요. 매뉴얼 북 있으시죠?"

"그거 읽어야 하는 거였어요? 너무 페이지가 많던데. 강사님도 익숙해지면 되는 거라 참고만 하라 하셨고요."

아마도 이 신입이 오래 남게 된다면 본인 주관이 뚜렷한 상담사가 될 것이 햇살의 눈에는 보였다. 스스로 알아가고 배워가야 늘어나는 일이라 햇살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기본 사용법과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상담을 했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갔다.


"햇살 선배. 식사하셨어요? 여기 제 동기들이에요. 제가 햇살 선배 얼마나 자랑했다구요. 누구 사수가 제일 친절한지 자랑했는데 제가 일등 했어요."

식사 후 양치를 마치고 녹차를 텀블러에 가득 담아 자리에 돌아오니 대여섯 명의 신입직원들이 햇살을 가운데 두고 모여들었다. 귀찮아하지 않고 잘 가르쳐줘서 다행이다 싶었다. 때마침 파트장이 오후도 부탁한다는 눈치를 보냈고 어쩌다 보니 신입과 사흘이나 같이 옆자리에 지내게 되었다.


"선배. 여기 생각보다 빡센 거 같아요. 저 아는 분이 이번에 외국계 회사로 이직했는데 중간중간 낮잠시간도 있고 절대 초근 안 한대요. 그리고 저희처럼 교육을 업무 후에 하지 않고 업무시간에 하고 수당도 무시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조건이 경력직이라서 저는 여기서 조금만 경력을 쌓고 넘어가고 싶어요. 선배는 경력도 많은데 제가 알려드릴까요? 여기는 비전이 없어요. 다른 기업이랑 통합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회사로 분류한다는 이야기도 돌던걸요."

회사 중견사원들이나 들음직한 소문을 어찌나 잘 알고 있던지 신입의 이야기가 아침 근무 시작 전부터 쉬지 않고 귓속말로 햇살에게 건넸다. 고객에게 대하듯 햇살은 고개만 끄덕이고 호응을 하며 넘겼더니 신입이 햇살의 마음을 알았는지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헤드셋을 차고 햇살의 상담이 시작되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게시간이 되어 모두 자리를 옮겨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떠났다. 신입도 싱글 웃으며 대여섯 모인 동기들 사이로 섞여 사라졌다. 오늘따라 목도 따끔거려서 자주 가지 않던 휴게실 옆에 있던 비상약함이 떠올라 여자휴게실 쪽으로 햇살이 다가갔다. 조그마한 소리가 휴게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여기 진짜 아닌 거 같아. 한 달은 채워야 교육비 제외하고 급여라도 나오지. 나 한 달만 하고 나갈까 봐."

옆자리의 신입 목소리가 틀림없다. 전화업무를 하다 보니 음색만 들어도 누군지는 정확히 맞출 자신 있던 햇살이 아니던가.

"말이 대기업이지 조건도 좋지 않고 인입 콜수도 너무 많아. 이런 데가 뭐가 좋다고... 봤지? 파트장 배 나온 거. 오늘 애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이 일이 하고 싶을까? 태교라는 걸 알긴 하나? 게다가 햇살 선배 봤지? 한쪽 눈 이상하더라? 임산부에 장애인에..."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야 할 텐데 머리가 깨끗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졌다.


"선배. 오늘 오후도 잘 부탁드려요.."

콧소리로 이온음료를 책상 앞으로 살짝 내미는 신입이 보조의자에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고마워해요."

"...네?"

"불만 가진 고객들이 제게 고마워한다고요. 전 이 직업이 좋아요. 제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상담원이라는 거 창피해하거나 겁먹거나 하지 않아요. 남을 돕는 일이 거창한 것만 인정받는 건 아니잖아요."

신입의 얼굴이 벌게졌다. 햇살은 신입이 건넨 이온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저한테 고마워서 음료수 준 거잖아요? 잘 마실게요. 전 거짓되게 고맙다고 표현하진 않아요. 잘 마셨어요. 고마워요."



"손님!!"

지숙은 은별의 등 뒤로 종업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는 은별이의 휴대폰이 보였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휴대폰을 가게에 두고 온 모양이다. 은별은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단발머리가 살짝 기울어지더니 눈이 반짝였다.

"은별이? 은별이 맞지?"

반가워하는 종업원 대신 은별이는 입만 삐죽 내밀고 대답도 안 한다.


"...혹시 너도 그 소문 들은 거니? 은별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부풀려진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참 좋았어. 나 임신했다는 거 사실이야. 난 그래도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거야. 그래서 자퇴 결심했고 검정고시도 준비하고 있어. 아이 낳고 대학도 갈 거야. 은별아 너도 열심히 공부해. 너네 학년 중에 네가 제일 봉사도 열심히 했잖아. 나중에 더 커서 만나자. 아. 그리고 이상하게 들리는 소문들 다 거짓말이야. 네가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너한테만은 좋은 선배로 남고 싶다. 자, 휴대폰..."

단발머리 종업원은 은별이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고 다시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배가 고플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은별은 극장 건물을 나와 한참을 걸었고 지숙은 은별 곁을 지켜 함께 걸었다. 청량한 바람이 그녀들 사이를 지나 마음을 식혀주며 스쳐갔다.

2021 마흐니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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