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지 않기를...

[마음 품고 살기 7]

by stamping ink

선선한 밤하늘이 지숙의 발걸음을 잡았다. 짧은 여름옷을 입어도 덥다 덥다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에 가벼운 외투 하나를 챙겨 나오지 않으면 낭패를 볼 때가 많았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크게 한번 앓아서 삶의 고비를 겪어본 친구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보겠다며 여행과 사진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예쁘게 잘 찍어서 학교 행사마다 공공연하게 사진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더니 미련을 남겨두고 교직을 잡았던 친구였다. 학생들과 지내며 보람도 있었지만 친구는 과감히 자리를 내어놓고 나왔다.


자신을 찾아 떠나겠다며 한동안 얼굴 보지 못한다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도보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제주 한 달 살이를 시작하겠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여 사계절을 다 보고 난 후 돌아오고 싶다고도 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해서는 이미 이른 결혼으로 장성한 아이들의 응원이 있었다며 걱정을 접어두겠다고 했다.


꿈..


늦깎이의 꿈을 지켜보는 지숙은 친구의 눈에 여고생 같이 반짝이는 눈빛에 같이 흥분을 했다.


남산만 한 배가 볼록해진 파트장이 조회시간이 다 되도록 도착을 하지 않았다. 늘 기계처럼 움직이던 콜센터 안의 사람들은 부속 하나 없이도 무리 없이 자신을 일을 해내갔다.

"햇살 씨. 파트장이 아이 낳으러 갔대. 이제 연락되었어. 아슬아슬해 보였는데 예정일이 보름이나 남아서 다음 주부터 쉬려 했는데 느닷없이 출근길에 산통이 왔다나 봐. 첫 출산이라 그런지 진통이 오래 걸리는지 아직 출산소식은 없는 거 같아."

부 파트장이 있었지만 팀장은 햇살에게만 알려주는 비밀 이야기라는 듯 속삭이고 떠났다. 분명 10분 이내 콜센터 알림 메신저에 알림 내용으로 뜰 것을 햇살은 예상했다. 그의 입은 그리 무겁지는 않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다음 날, 꽉꽉 들어찬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아는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다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매일 변함없는 패턴처럼 텀블러를 들고 정수기 앞으로 가다가 얼마 전까지 옆에 앉아서 OJT 받던 신입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밝고 높은 음성으로 동기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햇살에게 다가왔다.

"사수. 사수. 들었어요? 햇살 사수네 파트장 어제 아이 낳았대요. 그런데 무리해서 그런지 신생아 응급실에 있다지 뭐예요? 그러게 좀 일찍 휴직하고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분명 햇살보다 나이가 더 있는 후배이지만 조잘거리거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가볍기가 사춘기 아이 같았다. 아직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말을 섞을 순 없어서 햇살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라는 응원만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띠링. '친목회 공지' 2파트 파트장 이선희 씨가 오늘 아침 득녀를 했습니다. 병원은 자택 인근에 있는 아름 산부인과입니다. 규정에 따라 전체 회비에서 출산축하금 30만 원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따로 찾아뵙고 싶은 분들은 아직 몸이 회복하지 않은 상태이니 일주일 뒤 산후조리원으로 옮긴 후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친목회장 알림'


같은 파트원으로써 부 파트장은 일주일이 지난 후쯤 찾아가야겠다며 햇살에게 의사를 전했다. 아마도 부 파트장보다 경력이 조금 더 긴 햇살을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정 붙이고 지내던 이가 많지 않던 햇살로써는 부담스러운 제의였지만 간곡한 부탁이기도 하고 햇살의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인지라 부 파트장과 함께 하기로 했다.


"어머어머. 와 줘서 너무 고마워"


회비를 걷어 사들고 온 아이 내복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발그레 웃으며 받아 든 파트장은 카리스마 휘날리던 사무실 안의 그녀가 아니었다. 퉁퉁 부운 몸과 손가락으로 손님을 대접하려고 열심히도 몸을 일으키느라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햇살은 대신 음료수 병을 따서 부 파트장과 자신의 자리 앞에 두었다. 얼마 전 먼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동창생이 산후조리할 때 아프지 않아서 평소처럼 몸을 쓰다가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햇살은 들었던 바가 있어서 손님 대접할 사람이 없던 파트장 대신 바지런히 움직여줬다.

듣기만 해도 인상이 써지는 산통을 들으며 이맛살을 접고 있을 때 부 파트장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 미안해서 어쩌죠? 선약이 있었는데 취소된 줄 알았더니 기다리고 있는가 봐요.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쭈뼛거리며 부 파트장이 자리를 떠나려 짐을 챙겨 나갈 즈음에 회진을 하는 조리원 직원이 들어왔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통에 파트장에게 햇살은 간다는 인사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 떠난 직원이 나가고 머쓱하게 햇살은 웃었다.

"햇살 씨도 바쁘면 가봐도 돼요. 와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데... 외롭던 차에 너무 고마워요."

"외로우셨어요?"

누구보다 출산의 기쁨으로 엄마가 된 축복을 받아야 할 시점인데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아이가 다운증후군 일거 같아요. 아직 아이를 제대로 본 적 없어요. 검사를 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네. 아마 나 복귀하긴 힘들 거 같아. 시댁은 딸 낳아서 섭섭한 마음을 대놓고 표현하는데 아이까지 몸이 안 좋으니 내 탓으로 몰아붙이고 있어. 옛날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나한테 일어나지 뭐야."

파트장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울분을 토해냈다. 햇살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 어깨가 들썩이기를 멈추자 햇살에게 창피했는지 몸을 떼었다.

"나 사실 요즘 기도 많이 해요. 종교도 없는데 어떤 신이든 나 좀 도와달라 기도해요. 우리 아이 제발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아마도 내가 너무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아이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닐지 엄마 자격미달이죠. 출산휴직기간 다가올 즈음 사직서 제출할까 해요. 꿈이 눈앞인 것 같아 다른 사람 생각 안 하고 내 욕심만 내서 벌 받나 봐요."

조용히 듣기만 해주는 햇살이 고마웠는지 말을 들어주는 이가 그리웠는지 그녀는 목에 둘러맸던 손수건을 풀어 눈물을 찍어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끝장을 보고 싶은 내 모난 성격이 문제였지. 누굴 탓하겠어. 햇살 씨는? 꿈이 있어요? 뭐가 되고 싶어요?"

푸릇한 청춘이라 불리는 스물을 가뿐히 넘기고 서른의 줄기에 서있는데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은 낯선 그리운 말이었다.

"전.. 꿈이.. 예쁜 가정을 갖고 아빠 빼닮은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아이에게 저의 안 좋은 것들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셋까지 낳고 살고 싶어요."



친구와의 오랜 시간에 집에 돌아오니 기진맥진 몸이 쳐졌다. 지숙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몇 잔을 연달아 따르고 마시느라 냉장고가 빨리 닫으라고 경고음을 울려댔다.

"내가 열어놓고 방에 들어온 줄 알았네. 엄마, 언제 온 거야?"

은별이가 방에서 나오며 냉장고 문을 밀어 닫았다.

"오늘, 엄마가 기분이 좋았어. 이제 되고 싶은 일을 찾은 친구를 만났거든."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은별은 살짝 취기 보이는 지숙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무성의하게 '네네' 대답만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무심한 뒷모습은 꼭 지아비라니깐...

2021 마흐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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