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색이 진해지며 가로수를 흔들어 낙엽이 길가에 소복하게 쌓여갔다. 지나가는 청소원의 부지런한 비질에도 쏟아지는 낙엽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청소부 발길 뒤를 쫓아 낙엽이 쉼 없이 쌓여갔다. 주재원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가장의 부재로 지숙은 가사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미안해 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지만 홀로 판단하고 처리해야 할 때는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른 시간에 조퇴를 하고 은별이의 학교 앞에 차를 세워두었다. 오늘은 은별이의 생일이지만 축하해줄 사람이라고는 엄마뿐이라, 둘이서 은별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나갈 생각에 은별의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오늘만은 학원도 땡땡이하는 즐거움도 주어야겠다. 이렇게 한 두해 가다 보면 어느 사이 성인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딸을 생각하니 지숙은 어떤 마음으로 아이 곁에 있어야 할지 벌써부터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학교 앞 도로 옆에는 이미 아이들을 싣고 다닐 학원차가 줄지어 있어서 자리가 없었다. 학교 담벼락 따라 뒷골목에 차를 옮겨 세웠다. 미리 사둔 작은 꽃다발을 차 뒷자리에 챙겨두고 학원차 뒤로 몸을 숨겼다. 수업이 마쳤는지 밖에까지 충분히 들릴 멜로디가 울리자 곧 한두 명씩 아이들이 학교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교문 앞까지 삼삼오오 내려오는 또래 아이들은 옅은 화장기도 있는 아이부터 교복을 올려 입기도 하고 체육복 바지를 편히 입고 나오기도 했다.
요란스레 아이들의 수다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엷은 화장에 비슷한 틴트를 쓰는지 같은 색의 틴트를 발라 반짝였지만 아이들끼리 서로 자신만의 미묘한 차이를 부러워하고 따라 하고 자랑했다. 그 많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은별이를 놓치면 어쩌나 싶었지만 저 멀리서 나오는 걸음부터 은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엄마?"
다섯 명쯤 모여내려 오던 은별도 지숙을 발견했는지 친구들을 뒤로 하고 지숙에게 달려왔다.
"어쩐 일이야? 일하는 시간 아니야?"
"우리 딸이랑 데이트 하려고 조퇴했지."
"어? 오늘? 안되는데. 나 오늘 학원에서 기말 대비 특강 있는데?"
"학원 땡땡이하면 되지."
"안 돼. 오늘 안 가면 이번 기말고사 망친단 말이야. 학원 쌤이 꼭 오라고 했어. 안 돼, 안 돼. 엄마 딸이 공부해야 한다는데 미리 말하고 오지 그랬어. 친구들 기다린다. 나 학원 간다? 먼저 집에 가."
은별은 학원 버스에 올라타는 친구들을 눈으로 쫓아가며 다급한지 지숙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햇살도 인연이 닿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였다. 햇살의 한쪽 눈을 무딘 성격으로 달래주거나 위로해주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받아주는 덤덤한 사람이었다. 햇살의 아픔도 그의 마음으로 덮어 햇살은 그와 가정을 만들었다.
궁핍은 했지만 결핍이 있는 가정은 아니었다. 햇살은 아이를 낳고 한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까지는 아니어도 맞벌이로 조금씩 돈을 모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부부가 만날 시간도 적고 출장 잦은 남편이다 보니 햇살의 가족통장에는 생각지 않게 돈이 불어났다. 많은 사람에겐 적고 적은 사람에겐 많은 금액이지만 햇살은 만족했다.
쉽게 풀리는 일에는 작은 일도 고민이 되는지 햇살의 작은 고민 중 하나는 예전 파트장의 고민과 같았다. 티는 안 내지만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눈치 없이 집안 내 사촌들은 드러내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아이는 없고? 빨리 준비 안 하면 진짜 안 들어선다."
장남에게 시집가서 마음 급한 어른들은 경조사가 되거나 명절이 되니 두 해를 못 넘기고 조바심을 냈다. 두 해, 세 해가 지나갔다. 어르신들의 걱정이 현실이 되어갔다. 말없는 햇살의 남편이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
"병원을... 한번 가볼까?"
바람이 기적이 되었는지 일 년만 더 기다려보자는 말에 기다리는 마음을 알았는지 아이가 찾아왔다. 그렇게 햇살의 배는 하루하루 다르게 볼록하게 올라왔다. 햇살은 엄마로서 기도는 하나였다.
'눈, 입, 귀는 유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던데 우리 아이만큼은 나를 닮지 않기를'
햇살의 출산일이 다가왔고 아이는 마지막 출산 달이 될 때까지 엄마 뱃속이 좋은지 이리저리 움직였다. 문제는 아이가 거꾸로 앉아서 출산일이 임박해도 계속 자리를 못 잡았다.
"으윽.." 햇살의 다리사이로 이슬이라 불리는 양수가 터지던 날, 어쩔 수 없이 출장을 떠나서 남편 없이 인근에서 사는 친정 엄마를 급히 불렀다. 새벽부터 아파오기 시작한 배는 숨을 쉴 수 없이 창자를 훑었다. 잠시 극한의 고통이 지나가고나니 겁이 덜컥 났다. 이제 시작인데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산통이 멈춘 틈을 타서 남편에게도 전화를 넣자 바로 달려온다는 말을 들었다. 친정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기 위해 대비해둔 짐을 챙겨 들고 택시에서 실수할 수 있어서 수건 몇 장을 챙겼다. 새벽이지만 다행스럽게도 택시는 금방 잡혔다. 노인과 임산부가 차가 섰는데도 타지는 않고 택시 뒷자리에 수건을 넓게 깔고 있는 것을 보고는 택시기사는 의아해했다.
"뭐 하는 거예요?"
"제가 산모인데 양수가 이미 터져서 택시가 지저분해지면 피해일 듯해서 수건이라도 깔아 두고 타려 하는 데 괜찮을까요?"
갑자기 택시기사가 큰소리를 쳤다.
"뭐요? 엠블런스를 불렀어야지. 아니 곧 나올 판인가 본데 수건은 무슨 수건. 어서 타요. 내가 교통신호 딱지 안 떼이게 최대한 빨리 갈 테니 꽉 잡고!"
택시기사는 경력만큼 화려한 실력을 뽐내며 병원까지 햇살을 데려다 놓았다. 자신의 일처럼 먼저 병원 입구로 뛰어가 휠체어를 들다시피 끌고 와서 햇살을 앉히고는 접수처에 가서 안 그래도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아이 나올 거 같다고. 어서 의사 불러요"
아직 택시에서 짐도 못 내린 엄마는 택시기사의 꽁무니를 쫓기도 버거웠다. 햇살은 그들의 도움으로 산부인과 진통실에서 오르락내리락 변하는 고통을 견뎌냈다. 엄마는 택시기사에게 택시비에 돈을 더 얹어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고 자리를 떠났다고 했다.
"산모가 첫아이 출산이고 곧 나올 판인데 이제야 온 거야? 많이 열렸네. 택시에서 낳을 수도 있었겠어. 으음. 그런데... 간단한 검사하고 바로 출산 준비하지."
중년의 남자 의사는 햇살에게 주의사항 몇 가지를 더 안내하였다.
출산이 임박한 남산만 한 배에 여러 기구들이 부착되고 혈액검사부터 몇 가지 검사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서방이 병원 로비까지 왔는데 못 찾나 보다. 내가 얼른 내려갔다가 올게."
잠잠해진 진통에 잠이 몰려올 정도로 여유가 생긴 햇살은 엄마가 다녀온다는 말에 걱정마라고 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우고 딱 3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배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검사 결과를 들고 온 의사가 간호사와 무리 지어 검진을 왔다가 햇살의 침상 커튼을 소리 나게 제쳤다.
"보호자는? 산모님 혼자야?"
이상한 존대를 하는 의사는 햇살 옆을 두리번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쥐어짜듯 햇살은 의사에게 엄마가 잠시 남편을 데리러 나갔다고 하니 의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시가 급한데... 아이가 거꾸로 앉아서 자연출산을 하다가는 탯줄이 아이 목에 걸릴 위치라 위험하고 아이 다리 위치도 좋지 않아서 산모나 아이 모두에게 위험해질 수 있어서 아무래도 제왕절개를 해야 할 듯해."
"제왕절개요?"
의사는 햇살에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따라온 간호사에게 말을 했다.
"보호자 오면 설명드리고 동의 받으면 바로 연락해."
예상 밖의 일에 햇살은 머리가 복잡했다. 제왕절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니와 지금 밀려오는 고통은 곧 아이가 나올 것만 같았는데 간호사는 힘주지 마라며 다그쳐댔다.
"헉헉. 혹시 저희 엄마... 아니면 남편... 으윽... 아직 안 왔나요?"
"제가 묻고 싶어요. 어디 가신 거예요?"
30시간 같은 30분 정도 흘렀다. 간호사가 햇살의 전화기를 쉬지 않고 눌러댔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남편과 엄마에게 연락을 취하려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남편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엄마는 받지 않았다.
순간 '촥'하고 얇은 커튼이 젖혀졌다. 드디어 도착한 듯해서 극심한 고통에 눈물이 흐르려 했다.
"어? 아직 보호자 안 온 거야?"
초록 수술복을 입고 손에 장갑을 낀 의사가 햇살의 침상 옆으로 왔다. 햇살은 고통과 서러움에 소리 내어 울었다.
"햇살아. 햇살아."
때마침 남편과 친정 엄마가 병실을 들어왔다. 새끼의 울부짖어 우는 소리에 알아차린 듯 엄마가 나이 들어 걷기 힘든 다리를 재촉하며 햇살에게 달려와 땀범벅되어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찌 되신 겁니까? 지금 산모가 출산 직전이라 보호자가 동의를 하셔야 수술을 하는데 자리에 안 계셔서 이러다가 산모 죽을 뻔했다고요."
의사는 햇살을 대신해 화를 내며 남편을 이끌고 동의서를 쓰러 가라며 병실을 나갔다. 남편은 햇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허둥대며 자리를 떠났다.
"아이구. 내 새끼. 엄마가 미안해서 어쩌니. 이서방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나가고 내 휴대폰이 언제부터 무음이 되었는지 소리가 안 나는데 애미가 새끼 아픈 것도 모르고... 밑에 간호사가 접수할 때 10시간은 걸린다는 말에 이서방 만나서 밥도 못 먹고 올라왔다길래 내가 밥 사 먹인다고 주책을 떨었지 뭐니.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는 햇살을 이리저리 쓸어 만지며 미안함을 전하려 애쓰고 애썼다. 서러움에 눈물이 침대 시트에 흠뻑 젖어 내린 땀방울과 섞였다.
그렇게 얻어낸 딸아이였다. 힘들게 얻고 나니 다음 아이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형제 틈에서 없는 가정에서 나눠져야 할 것들을 늘 포기부터 하던 햇살은 자신의 딸에게는 뭐든 오롯이 주고 싶었다. 더 이상 무리해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도 노력하지는 않았고 둘은 있어야 외롭지 않느냐는 어른들의 말도 묵묵히 막아냈다.
햇살은 죽을 고비를 넘겨내며 품에 안은 아이를 간호사가 처음 얼굴을 보여주며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를 확인시켜줘도 아이의 눈만 바라보았다. 꼭 감은 눈을 보며 그저 하나만 빌었다.
'눈은 닮지 않게 해주세요'
특강이라고 하더니 은별이가 올 시간이 또 넘어가고 있다. 학원에 슬쩍 전화를 하니 시험대비 중이라며 이해해달라고 했다. 지숙은 원장에게 넌지시 오늘은 은별이의 생일이라고 말을 했으나 성과중심인 원장은 다른 아이들도 생일이지만 주말에 간단히 축하해준다며 입시 때까지 생일 몇 번 안 남았으니 그 이후 축하 많이 해주라 했다. 지숙의 교육방식과는 다른 학원이었지만 은별이가 꼭 가고 싶어 하고 성적이 오르고 있으니 아이가 원하는 대로 보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작은 케이크와 아침에 먹고 가지 않아 식은 미역국을 다시 따스히 끓이고 있었다. 은별이가 걱정이 되는지 글자만 익힐 뿐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지 지숙은 한 페이지만 계속 읽고 있었다.
"띠로링"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숙은 현관 앞까지 달려가서 은별이 가방을 들어주었다.
"힘들었지? 오늘 학원 가지 말라니까."
"어휴. 딴 엄마는 특강 언제 하냐고 난리인데 엄마는 참..."
"오늘 네 생일이니까 그러지."
"학원 친구들이 축하해 줬어. 밤에 먹으면 살쪄. 내일 먹을게."
케이크를 흘낏 보곤 지친 얼굴의 은별이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음을 가라 앉히려 지숙은 손가락 박수를 쳤다. 울컥 올라오던 것이 조금씩 내려갔다.
지숙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전이 되지 않기 위해 매해 아이를 안과에 안고 다니며 검사를 하며 눈이 닮지 않게만 해달라고 했다. 막상 잘 자라는 것을 보니 키도 컸으면, 여드름도 안 났으면, 공부도 잘했으면, 운동도 잘했으면 욕심이 불어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은별에게도 들렸는지 조심스레 지숙의 뒤에 와서 슬쩍 앉았다. 어느새 은별이가 지숙만큼 컸는지 의자 뒤에서 머리가 쑥 내밀어져 지숙의 얼굴에 은별의 얼굴이 다가왔다.
"에이. 생일은 나보다 엄마가 고생한 날이지, 엄마 내가 오늘 엄마 속상하게 한 보상으로 좋은 성적 받아올 테니 기다려봐. 선물처럼 성적표를 가져올 테야. 하하하."
철없이 날카로운 행동을 한 것에 대한 후회되었는지 돌아서서 애교 떨어대는 은별이 모습에 지숙은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