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구름이 하나 둘 모이더니 심상치 않은 구름 떼가 하늘을 메웠다. 봄비 내릴 때마다 옷이 점점 얇아지고 겨울비 내릴 때마다 옷이 두꺼워진다고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된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롱 속에서 몇 달동안 잠자고 있던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예전 같았으면 번쩍 들었을 텐데 두꺼운 이불 위에 쌓인 이불들 사이에서 끼어 있는 이불은 꺼내기도 쉽지 않아 지숙은 안간힘을 쓰니 이마가 찡그려졌다.
"어? 어?"
꾀를 낸다고 손을 쑥 넣어 한 번에 원하는 이불을 잡아 꺼내려다가 위에 쌓인 이불까지 우르르 지숙에게 쏟아졌다. 자연재해 영화에서 밀려 쏟아져 드는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왜 멍하니 서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우르르 쏟아지는 이불을 보며 지숙은 외마디 소리만 낼뿐 다리도 손도 움직이지 못했다. 버리기 아깝고 사연이 남아있던 이불들이 지숙의 몸을 덮쳤다. 하필 제일 무거운 목화솜 이불마저 지숙을 덮치니 이불에 푹 깔린 신세가 되었다.
"엄마 뭐 하는 건데?"
나름 생사의 고비처럼 위기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언제부터 보아왔는지 은별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안방 문에 기대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말도 나오지 않는 지숙이 손짓을 해대자 혀를 차며 문에서 몸을 떼고 지숙 위에 쌓인 이불의 쉽게 걷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숙은 어안이 벙벙했다.
"안 쓰는 건 좀 버리라고"
열 채쯤 되는 이불을 버리지 않고 이사 다닌다며 은별이가 잔소리를 했다.
"아까워서. 이건 엄마 시집올 때 외할머니가 해준 거고, 이건 너 태어나서 처음 사준 이불이고, 아. 이건 요즘 이런 솜 안 나온다? 얼마나 값비싸게 준 이불인데..."
은별이의 표정은 친정에 가서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는 나의 표정과 똑같았다.
"소중한 것이든, 잊어야 할 것이든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새로운 것을 넣을 공간이 생기지."
햇살은 서투른 엄마 노릇도 쉽지 않았다. 아이는 지숙의 마음처럼 크지 않았고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은 모습이 많았다. 참아주려 해도 복받치는 감정을 다스리기란 쉽지 않았다. 신생아 때는 밤낮을 가리지 못하는 아기인지라 육체적으로 힘듦은 있었으나 아이의 방긋 웃는 모습 하나에 모든 것을 견뎌냈다. 여름 무더위가 와도 에어컨을 아이에게 틀면 큰일 날 것 같이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이야기와 선풍기 괴담처럼 틀어놓고 잠을 자면 죽는다는 말에 햇살은 한여름 밤에도 밤새 부채질로 아이의 더위를 식혔다. 일회용 기저귀는 발진이 날 수 있으니 천 기저귀를 사서 손빨래해가며 아이에게 채웠고 모유 수유가 아이의 발달에 좋다고 해서 나오지 않는 모유를 애써가며 열 달을 채워 먹였다. 동생이 있어야 외롭지 않을 거라는 말에 아이가 조금씩 자랄 때마다 기대했지만 동생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억지로 병원까지 다니며 동생을 만드는 것까지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하나여서 문제가 생겼다. 미운 일곱 살 단계에 들어서니 극에 달했다. 일곱 살에 접어드니 아이의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모든 만지고 싶어 했고 해보려 했고 그에 따른 위험상황에 대비로 늘 시선이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를 위해 휴직을 신청하였다가 복직할 기간이 도래되었다. 남편과 긴 상의를 했다. 양가 어르신들의 나이도 있었고 마땅히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수입은 줄어들겠지만 어린 시절 맞벌이 부모님 아래 자라 열쇠를 목걸이에 메고 다니던 기억에 아이가 학교를 다녀올 때 집에서 반겨줄 이가 있는 쪽을 선택했다.
일곱 살이 되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습지 하나 시켜본 적 없는데 아이는 또래보다 한글을 쉽게 떼었다. 생각해보면 걷기도 빨라 돌잔치를 할 때 아이가 뛰어다녔고 말도 빨리 익혀서 어린 나이에 쉽게 의사표현이 되었다. 형제가 없어서 늦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곧잘 모든 것을 따라 하는 아이가 엄마들의 착각 1순위라던 '내 아이는 천재인가 봐'라는 의문을 햇살도 갖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에 있는 교습소와 뇌 발달 학습소를 들렸다. 역시 하나 같이 아이의 빠른 인지력에 감탄하며 자기네 기관에 맡겨달라 가입신청서를 내밀었다. 작은 교실마다 앉아서 학습 중이던 아이들을 보니 저 그룹에 우리 아이도 들어가게 된다는 것에 햇살은 가슴이 벅찼다. 한글을 빨리 떼어 어린이 서점에 들러 샘플 북도 받고 큰맘먹고 전집도 구입했다. 서점 주인은 아이를 칭찬하며 또래보다 빠른 수준의 책을 권했다. 나중에 재판매도 할 수 있고 다른 전집 구매 시 혜택도 있다는 말에 할부라는 늪에 주문 사인을 했다.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했고 장난감보다 책을 좋아하던 아이에게 큰 선물이라 마음을 먹으니 큰돈이 나간 것이 아깝지 않았다.
유치원이 끝나면 날씨만 허락하면 늘 들렀다가 오는 놀이터에 엄마들이 모여 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육아정보도 교환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행사들을 서로 공유했다. 워킹맘이라 불리는 엄마들은 그들이 철저하게 배제했다. 돈을 번다는 행위로 경제적 풍요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니 외벌이라 힘들게 얻어낸 정보를 그들에게까지 공유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입을 모았다. 첫아이 엄마는 신입 엄마처럼 그들의 말에 암묵적으로 따라야 했고 반대의견을 꺼내 든다면 워킹맘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아이를 위해 햇살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도 모두 이해해야 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신이 나게 놀고 있었다. 셋째를 키우며 위의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 늦둥이 엄마가 우두머리가 되어 엄마들에게 정보를 나눠주고 있었다. 영어공부의 시작과 유명한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는 방법, 교육 단계별로 아이에게 맞춤으로 알려줘야 할 모든 것들. 엄마들은 특강을 듣는 수험생처럼 귀를 쫑긋했다.
"아악!"
우두머리 엄마의 아이가 소리 질렀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향해 일제히 몸을 일으켜 달려갔다. 하필이면 햇살의 딸아이가 그 아이와 엉겨 붙어있었다. 두 아이는 서로 씩씩대었고 우두머리 아이의 머리에는 모래가 한가득 묻어있었다.
"쟤가요 저 책을 뺏을라고 해서 모래를 던졌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서로 신고자의 마음으로 앞다투어 상황을 설명했다. 뺏으려 한 아이의 완력에 햇살의 아이가 참다못해 모래를 뿌렸던 모양이다. 엄마들은 우두머리 엄마의 아이의 머리 위에 있는 모래를 털어주었고 햇살은 내 아이보다 모래로 범벅된 아이의 모습이 먼저 들어와 아이에게 대신 미안하다며 모래를 털어냈다.
"햇살 엄마. 애가 하나라서 영 버릇이 없지요? 역시 외동은 티가 나더라고요."
화가 난 것이겠지 싶었다. 외동을 싸잡아 큰소리 내며 분풀이를 했다. 빼앗으려 했던 자기 아이의 행동보다 모래를 뿌려댄 아이의 모습이 더 악한 모습이라 판단을 했을 것이다. 콜센터에서 진상이라 불리던 고객들을 상대하던 햇살이었지만 여기서 나서지 않았다. 겪어보지 못한 당혹감에 대답도 못하고 멈추어버렸다.
"엄마. 쟤가 먼저 내 책을 빼앗아서 찢었다고. 그리고 내가 책 달라고 하니까 혼자 모래를 막 뿌렸어. 그래서 자기 몸에 다 묻었어."
아이의 상황설명과 모래를 쥔 적 없는 아이의 손바닥이 사건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엄마 미워."
아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햇살은 아이의 손을 잡고 엄마들에게 급히 인사로 마무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몸을 씻겨주며 손바닥에 모래라곤 찾아볼 수 없어 아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이를 믿어주고 편이 되어 주지 못한 마음에 미안하다 말을 해야 하는데 어른이 아이에게 사과한다는 것이 어색했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인터폰도 같이 울리는 것으로 봐서 동네 엄마인 것을 직감했다. 우두머리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로 흘러나왔다.
"자기야. 아까 애들이 그런 거니 너무 화내지 말고. 우리 서로 아이 잘 단속하자고. 오해하지 말자?"
본인도 사건에 대해 모두 파악했을 것이고 미안한 감정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과보다는 대인배 인척 서로 어색해하지 말고 지내자며 얼버무렸다. 꼬집어 싸우기엔 평일엔 매일 보아야 할 사람이라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남편이 돌아오고 속사포처럼 오늘 이야기를 쏟아냈다. 말수 없는 남편은 한마디만 내뱉었다.
"아기 낳았을 때 어떻게 키우고 싶었어?"
수없이 기도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했고 매해 어린아이 손을 잡고 안과를 가서 검진을 받을 때마다 유전은 아닐 것 같다는 말에 안심을 했는데 하나를 얻으니 다른 하나가 탐이 났나 보다. 잠든 아이를 보며 햇살은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탐나는 것이 가득해서 자꾸 쌓아 올리다 보니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바닥에서 기억도 나지 않았던 모습이 후회되었다.
이불은 거실에 널따랗게 펼쳤다. 솜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지숙은 팡팡 두드려서 자리를 잡았고 은별이는 사진을 찍었다. 지금 필요한 이불은 세 채 정도만 있으면 되는데 소중해서 버리질 못했다. 지숙이 곱게 옆에 접어두고 다음 이불을 펼쳐두면 은별이는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이불들을 모두 거실에 접어 놓고 소파에 앉자 은별이가 다가왔다. 화질이 좋은 휴대폰으로 찍힌 이불들은 생생한 색감에 눈앞에 있는 이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자 이거 내가 파일로 저장해 둘 테니 보고 싶을 때 봐."
"그래. 그러자. 그럼 이 이불은 어디에다가 두지?"
"요즘 기부나 기증 많이들 해. 팔기는 너무 오래된 거지만 대신 이불솜이 워낙 좋은 거라며. 필요한 사람들 나눠주면 좋지."
추진력 있게 은별이는 휴대폰을 뒤져서 기증할 수 있는 인근에 있는 단체를 찾아냈다. 생각보다 기증을 할 수 있는 물품 목록들이 많았다. 창고에서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왔다.
"우리 이것도 기증할까?"
졸지에 집안 대 정리를 했다. 우선 사고 뜯지도 않던 증정품이나 겹치는 물건 중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 담아냈다. 커다란 쇼핑백에 물건이 쌓였다.
"욕심내지 말고. 그러다가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어. 오늘은 열개만 정리해 봐."
은별이의 판단에 지숙도 동의했다. 정말 사용하지 않는 물건만 챙겨서 집 근처 단체로 은별이와 함께 옮겼다.
다행히도 집에서 운동삼아 걸을 만한 거리에 단체 매장이 있었다. 기증받은 물건들이 일반 매장과 다를 바 없이 진열되었지만 '이곳의 물건은 소외계층을 돕는 데 전액 사용됩니다'라는 문구만 다를 뿐이었다. 이불을 한 보따리 들고 온 햇살과 지숙의 커다란 가방을 봉사자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기부영수증 처리해 드릴까요?
"그게 뭐지요?"
"이렇게 기증하거나 기부하시면 연말정산 시에 기부금 내역에 등록해 드려요."
"좋네요. 그럼 그렇게 진행 부탁드려요."
물건을 들고 뒷 창고로 단체 봉사자들이 옮기고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이게 기부 영수증이고요. 문자로도 발송되실 거예요."
지숙과 은별은 간단히 목례를 하고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영수증에 적힌 내용을 보았다. 지숙이 아끼고 아꼈던 이불도 '이불 6'이었고, 작아 입지 못해 가져 간 여름옷이나 값비싸게 준 옷도 '옷 2'로 적혀있었다.
버리고 잊는 연습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정말 원하는 한 가지를 소중하게 마음속에 담아보니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