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서기

[마음 품고 살기 10]

by stamping ink

글씨가 가득 찬 종이가 불쑥 지숙이 읽던 책 위로 올라왔다. 페이지를 막 넘기려던 찰나에 무심히 올라온 종이인지라 종이끼리 부딪쳐 잠시 허공을 날았다. 한 장 한 장 바닥에 떨어지는 종이를 잡아 볼 생각조차 못하고 지숙은 멍하니 날리는 종이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엄마. 성적표 나왔는데..."

종이가 바닥에 다 떨어졌을 때서야 비로소 종이의 출처를 들었다. 은별과 지숙은 허리를 굽혀 흐트러진 몇 장의 종이를 다시 추렸다.


은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몇 번을 받아온 성적표이지만 지숙의 눈에는 예전과 다른 산출식이 성적표가 아닌 시험지 같았다. 여기에 적혀있는 숫자를 이해하려면 옆에 은별이 앉아서 하나하나 짚어줘야 했다.

"나 이번 수행평가는 다 만점 받았어. 우리 학교 인근에서 시험문제 젤 어렵게 내는 거 알지? 점수는 이렇지만 석차는 이렇게 되는 거야."

은별의 손가락 따라 지숙은 바삐 눈을 움직였다. 문제풀이집처럼 자세한 설명을 마치자 지숙이 물었다.

"네가 원하는 성적이 나온 거야?"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 했어."

"그래. 그럼 됐어. 나중에 아빠 오면 아빠도 보여드리자."

은별은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엄마의 독서를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아니면 미뤄두었던 일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방으로 가다가 지숙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이 성적이 맘에 들어? 난 같은 학원 다니는 서희보다 점수가 낮아서 화가 나는데... 내가 걔 얼마나 많이 수학 문제 알려줬는데. 짜증 나."



'위~~ 잉'

햇살의 귀에 며칠 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를 꼭 막고 잠시 침을 삼키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횟수가 잦아지자 햇살도 겁이 났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하교시간까지 시간을 따져 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낯익은 얼굴이 햇살 뒤의 자리에서 햇살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목소리 기억은 잘 하지만 얼굴 기억은 더딘 햇살은 그녀가 기억나지 않았다. 말을 걸어준 이가 무안할 것 같아서 급히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 랜만이죠?"

화장을 곱게 하고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햇살을 보고 있었다. 햇살은 그녀의 가슴에 있는 신분을 밝혀주는 작은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푸힛. 야. 너 나 기억 못 하는구나? 나 은경이야. 이은경."

이름표에 적힌 이은경이란 이름이 스스로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맡아놓은 아이였다. 집안 사정도 좋아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은경의 어머니가 가지고 온 간식에는 처음 먹어보는 간식이 참 많았다. 은경의 어머니가 학교에 나타날 때면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교장실을 은경은 어머니와 함께 양손 가득 과일바구니를 들고 들어가는 모습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은경을 통해 차별이란 단어와 특혜라는 단어를 몸으로 느꼈다. 그 권력의 끈을 잡아보고 싶은 아이들 몇몇은 은경의 호의무사처럼 옆을 지키기도 했다.


눈이 잘 안 보이는 햇살의 지정석은 늘 교탁 아래 자리였다. 선생님 코 앞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여서 아이들이 기피하는 자리였지만 햇살은 그 자리가 좋았다. 한 달에 한 번 자리는 바뀌어도 햇살의 자리는 지정석이었다. 햇살을 제외한 아이들이 교탁에 놓인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종이쪽지를 뽑았다.


단짝끼리 짝꿍이 되어 기뻐하는 아이, 구석자리가 되어 좋아하는 아이, 생각지 못한 자리라 투덜대는 아이.


한 줄로 늘어선 아이들이 점점 줄더니 햇살 옆자리에 은경이 서있었다.

"은경이 자리 불편하니? 바꿔줄까?"

불만을 토해놓은 아이들에겐 매몰차던 담임은 은경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가왔다.

"아니에요. 여기 앉을게요."

그리고는 햇살을 보며 인사를 했다.

"한 달 잘 부탁해."


장난기 어린 표정이 은경의 얼굴에 박혔다. 가방을 뒤적이더니 문구점에서 팔지도 않는 일본 학용품을 필통에서 꺼냈다. 아이들이 다투어 은경이 책상 주위로 몰려들었고 은경은 연필을 집어 햇살에게 주었다.

"이거 한국에선 안 팔아. 아빠가 일본에서 사다 주신 거야. 햇살이 너 글씨 예쁘더라. 그래서 너 주고 싶어서 가져왔는데, 줘도 되지?"


은경은 햇살을 챙겨주었다. 햇살이의 마음을 읽어주기도 했다. 둘만의 비밀도 생겼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태도가 햇살을 난감할 때가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처음 생긴 친구를 잃을까 봐 햇살은 은경의 변덕스러운 모습도 감싸안았다. 어쩌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진짜 친구가 되어주는 은경이가 고마웠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날이 담임을 통해 급히 전학을 갔다는 말만 전해지고 은경은 사라졌다.


그런 작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서로 연락처도 주고받고 진료 후 인근 카페로 옮겨 못다 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햇살아, 나 사실 너한테 너무 미안한 거 많아. 그때 너랑 다니면서 내가 위에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너랑 다니며 난 철없이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아. 참 바보 같지. 몰랐니? 다들 너를 이용한다고 욕하면서도 우리 집 잘 살아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 그러다가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니 아이들이 나한테 똑같이 하더라. 그때 알았어. 정말 미안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눈가에 눈물이 고인 은경의 마음은 진실되게 다가왔다.


"엄마는 친구들 샘내고 미운적 없어?"

지숙의 마음 역시 아이와 동화되어 은별의 친구인 서희가 미워져야 은별이가 마음이 풀릴 것 같았으나 조용히 아이를 안아주었다.

"친구는 앞뒤로 서는 게 아니라 옆에 서 있는 거래. 한자도 그래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지숙은 처음 나란히 걸어준 친구들 떠올리며 은별을 보았다.

"알.. 아... 서희 착해. 그래서 내가 짜증 내도 다 받아줘. 나한테 한 번도 화낸 적도 없고."

"엄마는 은별이가 서희랑 옆에 서서 오랫동안 나란히 걸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은별이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서희야. 우리 시험도 끝났는데 코인 노래방 안 갈래?"

2021 마흐니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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