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달
팔에 새겨진 레터링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더디게 오길 바랐던 그날이 다가왔다.
빠진 것이 없는지 방을 둘러보던 채비서가 단출한 가방에 남은 짐을 정리하던 수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종이컵 전화기를 흔들며 말했다.
"다 정리한 거 같은데 이것도 챙겨가게?"
방 안에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던 수빈이었지만 종이컵을 보는 순간 눈이 반짝였다.
수빈은 채비서의 손에서 종이컵을 재빠르게 받아 들곤 아빠가 만들어준 보물상자에 조심스레 종이컵 전화기를 넣고 품에 안았다.
방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재촉하는 채비서의 손에 이끌려 짐과 함께 떠밀리듯 자동차 뒷좌석에 앉혀졌다.
출국시간을 맞추어 떠나야 하는 마음은 알지만 알 수 없는 허기짐이 밀려왔다.
수빈의 늑장의 이유는 아쉬움이었다.
어제저녁, 영숙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누긴 했지만 지금 영숙이 보고 싶었다.
자동차가 움직이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수빈은 영숙의 모습을 찾으러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속하게 등나무 근처에도 운동장 한편에도 기숙사 입구에도 영숙은 보이지 않았다.
교문을 빠져나가며 이별을 인정하려 하니 수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두 눈을 비비며 눈물을 삼키려 할 때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는 영숙이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수빈은 급히 채 비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멈춰 달라는 간절한 표정에 채비서는 짧은 한숨을 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멈춰달라 부탁했다.
"빨리 다녀와야 해요."
자동차가 멈추자마자 수빈은 뒷문을 열고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가뿐 숨을 돌리고 수빈은 영숙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이 기지배는 왜 또 오고 지랄이여. 어제 그리 울어댔으면 됐지.”
맘에 없는 말을 해대는 영숙의 손을 수빈은 억세게 잡았다.
곱게 접은 종이가 영숙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영숙은 수빈의 손에서 옮겨진 종이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수빈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려. 잘 가. 아프지 말고. 한국 오게 되걸랑 들리고...”
피붙이처럼 가슴에 안은 채 영숙도 아쉬움을 삼켰다.
수빈은 영숙의 품에서 눈을 잠시 감았다가 곁으로 다가 온 채 비서를 보곤 떨어지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을 떼기 전에 다시 수빈은 몸을 돌려 왼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영숙에게 쥐여 주었다.
손목에는 잉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해 진하게 적힌 cifrar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총각은 왜 나는 안 해주고 말이야. 나도 너랑 똑같이 문신하고 싶었는디."
수빈은 급히 볼펜을 꺼내 영숙의 팔에 같은 글씨를 빠르게 적어 놓았다.
“시.부.럴. 지.킬.게.요.”
어눌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빈의 목소리가 나왔다.
채비서가 놀라 눈과 입이 벌어졌다.
이 순간 누구보다 수빈의 목소리에 기뻐할 영숙이었다.
'윙~'
하지만 때마침 보청기가 고장이 났는지 영숙에게는 수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외국은 의료기술이 좋다니까 가서 말도 하고, 귀도 고치고 그러고 와라.”
아쉬운 손 인사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정적에 잠긴 시골 버스정류장이 되고 나서야 영숙은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종이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조용히 펼쳐보았다.
할머니랑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벌써 이렇게 헤어지는 날이 와버렸네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참 무서웠었어요.
전 늘 혼자였거든요. 하지만 혼자였던 제게도 한때 친구가 있었어요.
착한 아이였어요. 가난하지만 구김 없이 저를 다 이해해 주는 친구였어요.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금방 가까워졌어요.
제 마음이 상처가 곪았던 날. 친구에게 저랑 같이 팔에 선을 그어보자 했어요.
그 친구는 놀랐어요. 왜 그걸 해야 하나 했어요. 언제나 혼자였던 저는 친구랑 모든 걸 같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친구의 약한 부분을 이야기했어요.
저와 함께 팔에 선을 그으면 제가 돈을 주겠다고 해버렸어요.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돈은 받았지만, 겁을 냈어요.
둘은 처음으로 술을 마셨어요. 엄마가 사다 둔 양주들이 많았는데 한두 잔 먹으니 친구도 용기가 생겼나 봐요. 전 기분이 좋았어요. 나랑 모든 걸 같이 하는 친구가 생긴 것에 너무 들떴더랬어요.
저는 기쁜 마음에 깊은 잠에 들었어요. 불면증이 심했는데 그날은 잠이 깊이도 들었어요.
아침이 되고 일어나 보니 친구가 계속 잠만 자더라고요. 흔들었어요. 계속. 근데 친구는 움직이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처음 선을 긋던 친구가 술기운에 너무 깊이 그었다는 것을...
그렇게
친구가 떠났어요.
저 참 나쁜 아이라서 아무 의미 없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제게 와 주셨어요. 저는 떠난 친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문신가게 주인이 친구의 오빠였어요. DM을 보내 매일 용서를 빌고 또 빌었어요.
어느 날 답변이 도착했어요. 용기 나면 찾아오라 했어요. 저의 잘못을 문신으로 덮어주었어요.
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cifrar'
기다려 주세요.
영숙은 손에 쥔 편지를 묵묵히 내려보았다.
“이놈의 기지배. 이제 겨우 단어만 읽는데 뭐라 쓰고 간겨? 에이 도통... 더 공부하라 이건가? 시부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