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허기
“어때? 이젠 제법 쓰지?”
어느새 교정을 감싼 플라타너스가 손바닥만 한 노란 잎을 떨구며 바닥에 수북이 쌓여갔다.
이젠 소리 나는 대로 글을 제법 옮기는 영숙의 모습을 보고는 수빈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내 어두운 얼굴이 되자 영숙은 수빈의 얼굴을 바로 살펴봤다.
휴대폰 문자를 읽어주는 기능을 켜두고 수빈은 자판을 눌렀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준비가 되었다고 오라네요.’
“그렇구먼. 잘됐네.”
영 아쉬운 표정의 영숙을 보며 수빈은 다시 자판을 눌렀다.
‘할머니. 저 소원이 있는데... 서울에 가보고 싶어요. 같이 가 주실래요?’
“서울? 왜? 전에 살던?”
뜻밖에 수빈의 부탁에 영숙은 주말에 같은 발걸음을 남기기로 약속했다.
영숙이 바라본 서울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사람들은 빼곡하고 숨 쉴 틈 없이 밀고 밀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높은 건물과 정신없이 달려대는 자동차들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이 익숙해 보이는 수빈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대며 앞으로 나가고 있다.
수빈을 놓칠까 싶어서 영숙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서울 한복판과 어울리지 않는 좁은 계단에 닿자 크게 한숨을 쉰 수빈이 먼저 올랐다.
영숙은 이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쫓아가기 급급한 채 계단을 올라섰다.
“딸랑”
회색 철문 옆에 붙어있는 유리문을 밀어보니 주인보다 먼저 문에 붙은 작은 종이 반기었다.
영숙의 눈에는 생경한 광경이 펼쳐졌다.
벽면 가득 문신을 한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 붙어있고 각지각색 물감들이 선반에 채워져 있었다.
가운데 자리한 검은색 침대와 의자는 병원 같기도 하고 침술원 같기도 했다.
"촤락"
반짝이는 유리구슬로 만든 발이 요란하게 흔들며 사나이가 나타났다.
“예약하신 이수빈 씨?”
마주 선 두 사람의 시선이 말대신 오갔다.
수빈은 굵은 시곗줄을 풀러 그녀가 그어둔 선을 손으로 가리켰다.
상처가 드러나자 영숙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사나이는 수빈을 팔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디자인이 여기 들어가긴 무리가 있네요. 가능한 건 레터링이면 커버가 가능할 것 같은데...”
수빈은 휴대폰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레터링도 괜찮습니다.’
“여기 뭐 하는 데냐? 시부럴.. 뭐 타는 냄새도 많이 나고... 아주 귀신 나올 집이구먼.”
“시부럴?”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읊조렸다.
“아... 그게 내 말버릇이라. 그러니까. 여가 혹시 문신 집? 수빈아. 너 설마 이걸 할라 그러냐? 여자는 몸에 문신 있으면 못써.”
수빈은 자판을 두드려 영숙에게 들려주었다.
‘이걸 지워야 용기가 생길 것 같아요.’
휴대폰과 함께 길고 날카로운 상처를 지닌 팔을 수빈이 내밀었다.
“그렇다고 문신을... 다른 방법은 없냐.”
둘 사이에 성난 몸짓이 오가자 보다 못해 사나이가 끼어들었다.
“준비가 안 되었으면 다시 오셔도 됩니다.”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수빈의 단호한 모습을 보니 영숙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 시부럴.. 다시 용기 내서 살겠다는 다짐이라는데 해야지. 그려. 햐. 대신 니 맴 속에 있는 미움이랑 아픔도 다 덮어버려야 한다?”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나이가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써 그들에게 다가왔다.
‘cifrar'
“스페인에 있었을 때 들었던 말 중에 시프라(cifrar)라는 단어는 '암호로 쓰다.'라는 뜻이 있답니다. 상처를 암호처럼 써서 감추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좋은 뜻이네요.”
“시부럴?”
영숙의 발음에 표정 없던 사나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거 하는데 추가혀도 돼요? 나도 하나 똑같이 써주시게."
영숙의 말에 수빈과 사장이 놀라 쳐다보았다.
"내도 맴 속에 묻혀둔 아픔을 덮고 시작하고 싶은데 되겠나? 내야 이제 시집오라는 할아버지구도 없으니까 문신까지 꺼 해볼까 혀."
준비과정을 마치고 귀를 찢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검은 먹물 방울들이 상처 위에 덮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