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봄기운도 제대로 느끼기 전, 여름이 계절의 문턱을 넘고 있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교정엔 몽글몽글한 벚나무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다.
교실 창틀까지 뻗은 가지를 당겨 버찌를 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본관 가득 울려댔다.
시끌벅적한 본관동과 수업이 끝나 조용해진 별관 사이를 잇는 복도를 한 소녀가 걷고 있다.
같은 공간이라 부르기에도 무색하게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복도는 아직 겨울의 여운이 가득했다.
목적지에 언제 닿을까 싶을 정도의 무거운 발걸음이 복도 끝 교실 문 앞에서야 멈추어 섰다.
문 앞에 붙여놓은 흔들리는 종이 한 장은 엄숙한 글귀와 어울리지 않게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소녀의 등장으로 잡담이 오가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비어있는 자리에 소녀가 시선을 받으며 앉았다.
낯익은 선생님의 헛기침 소리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굳은 표정과 어울리는 낮고 진지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오갔다.
화장기 없는 중년의 여자는 소녀를 향해 뜨겁고 사나운 시선을 쏘아댔다.
소녀 옆에 앉은 남자가 변호를 시작하자 중년의 여자는 오열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위이잉~"
소녀의 눈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성에 날카로운 기계음이 귀에 울렸다.
보청기에 의지해 작게나마 들리던 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 같은 진동이 되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는 두 귀에 꼽혀있는 보청기를 빼내고 홀로 고요한 세상에 들어갔다.
흰자를 드러내며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럴 땐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녀 옆에 냉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남자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종이 한 장을 소녀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쓴 종이 위에는 ‘수빈 학생. 동요하지 말아요. 난 학폭 전문 변호사예요. 걱정 말아요.’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녀의 반응에 ‘돈 요구하는 벌레 같은 사람들이니 조금만 참아요. 잘 해결해 드릴 테니 엄마한테 제 이야기 잘해줘요.’라 적힌 종이를 다시 책상아래로 전했다.
울부짖는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변론에만 몰두하는 그가 순간 벌레처럼 보였다.
수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린 버찌가 매달리기 시작한 벚나무는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