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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야 Dec 09. 2020

보통 사람의 불교 공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나는 불교학 전공자가 아니다. 불교를 혼자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다. 절에는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 간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종교가 있냐고 물으면 꼬박꼬박 불교라 답한다.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 불교를 믿는다고 믿는다.


이유는 있다. 문화 유산 때문이다. 나는 유년을 외가에서 보냈는데, 외가의 종교가 불교였다. 부모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집안에서 자라면 아이가 클래식을 일상적으로 하듯, 불교는 공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전축에서 철커덕 하며 테이프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목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딱, 따닥, 딱, 딱, 딱, 딱. 이어 독송이 흘러나왔다. 어느 날은 반야심경, 어느 날은 금강경, 어느 날은 천수경이다.


나는 유독 잠이 많은 아이였다. 소음에 무던했다. 납작한 뒷통수로 반듯이 누운 채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이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같은 암호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린 잠을 이어갔다.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봐 조심한 적이 없었다. 손녀를 향한 무슨 종교적, 교육적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하루 일과 속에 독송과 내가 평등하게 자리할 뿐이었다.


이불에서 나오고도 독송은 한참 뒤까지 계속됐다. 뜻은 몰라도 반복 학습한 탓에 나는 어떤 구절들은 덩어리째 외울 수 있었다. 하루는 장난기가 발동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독송을 노래처럼 따라 부르며 깨춤을 췄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팔에 매달려 물었다. "할아버지, 부처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말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착한 어린이가 되라시는거야." 그걸 왜 그렇게 어려운 말로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되묻지 않았다. 궁금하긴 해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내게는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그것을 매일 빠짐없이 듣는다는 점이 의미 있었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것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부처님을 많이 사랑하나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의지하는 분이니까,
나도 부처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


외할머니를 따라 절을 많이 쫓아다니기도 했다. 별이 총총한 새벽, 할머니 손 잡고 마을 근처 조그만 절인 대원사에 가곤 했다. 외가 식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님이 예불할 때 나 혼자 법당을 방방 뛰어다니다 마이크를 쓰러뜨린 일화도 있다. 스님의 염불이든 할머니의 108배든 그것이 끝난 후에는 할머니와 동년배인 동글동글한 할머니들 사이에 섞여 앉아 절밥을 먹었다. 서로를 보살님이라 부르는 할머니들은 나를 향해 자애로운 눈빛을 별빛처럼 쏟아부었다. 마냥 귀여움을 받는 그 느낌을 나는 좋아했다.


새벽부터 절에 따라 간 날은 할머니와 곧장 할머니 옷가게로 갔다. 할머니는 시장 전방에서 중년여성을 대상으로 옷을 팔았다. 주로 꽃이 알록달록하고 품이 넉넉한 옷들이었다. 할머니가 전방을 아무리 꼬박 지켜도 손님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 때로 이웃가게 할머니들만 구들장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내게 몇 개월 지난 달력을 찢어 뒷면에 부처님 말씀을 따라 적게 했다. 전방에는 어린아이가 시간을 떼울만한 놀잇감이나 학습교재가 딱히 없었다. 내가 구들장에 엎드려 절에서 받아온 얇은 유인물을 따라쓰다 보면, 할머니는 어느새 지친 표정으로 한쪽 머리에 팔을 괸 채 쿨쿨 주무셨다.



마흔을 앞두고 새삼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불교가 뭘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불교를 삶의 등불로 삼았을까. 그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존재였을까. 부처님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걸까.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셔서 직접 여쭤볼 수조차 없다. 나는 외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 채 등불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삶의 여러 시험에 들 때마다, 가령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거나 원치 않는 바를 맞닥뜨려야 했을 때마다 그 희미하고 어렴풋한 등불을 가만히 흔들어보곤 했다. 그 정도를 믿음이라 여겼다.


이제 나는 제법 진지하고 성실하게 불교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공부를 하면서 내가 받은 등불을 환하게 밝혀보고 싶다. 환한 등불로 어두운 길을 비춰보고 싶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내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가꿀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부처님, 제게도 가르침을 주세요.'  손 모아본다.


[부처님 말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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