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다시 묻는 질문들
평소에 자주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돼!"이다.
생각보다 쉽게, 자주 그 말을 내뱉는다.
'이해가 안 돼'라는 말로 이해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일상 속에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없는 쪽'에 놓아두곤 한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12월 31일 밤 교회에 앉아있을 때였다.
크리스마스예배, 송구영신예배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예배 안내 위원의 발길과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인 그날은 앞쪽부터 채워 앉아야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고, 좀 늦게 오는 사람도 뒷자리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긴 의자에 보통 4-5명씩 앉았다. 내가 앉은자리 3-4칸 자리 앞에 모녀로 보이는 마흔 정도 되는 여자분과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앉아있었다. 안내위원은 정중히 안 쪽으로 자리를 옮겨 달라는 요청을 손짓과 작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엄마로 보이는 분이 인상을 찡그리며 싫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고, 옆에 딸에게 '우리 보고 들어가라는데?'와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뒤쪽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역시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지~ 남편이나 다른 가족이 더 오시나 보다.. 하며 억지로 '이해'해 보려고 했고, 잊어버리고 예배에 집중하며 예배를 맞췄다.
예배가 끝났을 때 다시 그 자리가 눈에 보였다.
중간에 다른 가족은 오지 않았고, 그 자리에 두 명만 앉아있었다.
그 순간 또 '이해가 안 돼'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타이핑 치듯 그려졌다.
'이해'라는 단어는 꽤 정당해 보인다.
누군가를, 어떤 상황을 이해한다는 말은 꽤 마음이 넓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말은 사실 오만 일지도 모른다.
이해라는 말의 기준이 '나'인 경우기 많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돼 라는 말 앞에 '내 생각엔'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내 기준, 내 생각, 내가 속한 사회의 기준에 적합한 것이 이해라는 선 안에 들어온다.
결국 이해란 가슴보다는 머리를 통해 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다. 머리는 자꾸 '이유'를 찾지만, 마음은 그저 '품어야 할 대상'을 찾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임을 깨닫는다.
송구영신예배의 그 모녀도 딸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유난히 불편해하는 아이였을지도 모르고, 엄마는 그날 유독 힘든 날이라 누군가에게 방해받지 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라는 말은 자주 한다. 그리곤 곧바로 생각한다.
그 이해의 기준이 '나'로 돌아와 있지 않은지, 이해한다는 말이 나의 오만이 아닌 지..
이해를 머리로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정한 이해는 기준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의 사정에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이해되는 것과 안 되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매번 다짐하면서도 다시 누군가를 판단하고 마는 나를 발견하지만, 그래도 10년쯤 지나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소망해 본다.
*이해(理解) : 명사
1. 사리를 분별하며 해석함.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3.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네이버 국어사전-
사진출처(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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