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생 때 서울에 올라왔고, 최근 패션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한 직장인이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도심의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판매하는 괜찮은 와인 이름 몇 개정도는 외우고 있다. 그는 비싸고 화려한 명품 옷을 휘감기보다는, 적당히 품질이 좋은 옷과 심플한 명품을 조화시키는 능력도 탁월하다.
지호는 종종 릴스나 쇼츠를 넘기면서 새롭게 뜨는 카페나 식당 정보를 챙겨두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새로운 곳을 찾으러 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본 식당을 한 번 더 가거나, 익숙한 바에서 가성비 와인이나 위스키를 고르는 것도 그에게는 충분한 즐거움이다. 그는 “어느 정도 트렌드를 아는 것도 좋지만, 나에게 맞는 장소가 더 중요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그만의 멋을 즐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요즘 뜨는 거기 어디더라?"라고 기억을 더듬을 때,
"아~ 거기 흑백요리사 나온 셰프 식당? 거기 뜨기 전에 가봤는데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뿌듯함 이상의 희열감을 느낀다.
친구의 청첩장 모임이 다가오면서 그는 평소 동경하던 톰포드(Tom Ford)의 재킷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격을 보고 망설였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빛나는 순간을 상상하자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지호는 결국 재킷을 질렀다. 파티 당일, 벗어놓은 재킷 안 쪽에 톰포드 로고를 발견한 친구의 "와, 이거 톰포드네!?"라는 감탄 섞인 부러움에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이게 내가 바라는 삶이야”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한 번은 젠틀몬스터와 메종 마르지엘라가 콜라보한 안경을 충동적으로 산 날, 그는 집에 돌아와 우울감에 빠졌다. 잠실 백화점 매장에서 반짝이던 그 안경이 집으로 와서 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필요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면 채워지겠지’라며 무작정 자신을 위로하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이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방금의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청구서와, 소비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공허함 속에서 지호는 알게 된다. 어쩌면 소비를 통해 느끼려 했던 만족감과 자신감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트렌드에 맞추어 사는 삶의 윤택함은 쉽게 떨칠 수 없다. 결국 지호는 다음 달에도 새로운 브랜드의 옷을 사며, 또 다른 사치를 꿈꾸고, 다시 그 고요한 밤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지호는 소위 잘 나가는 '인싸'의 삶을 살고 있다. 요즘의 MZ세대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지호는 트렌드소비형이다.
트렌드소비형은 돈을 자기표현의 수단이자, 행복으로 가져다주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이들은 소비를 단순한 구매 행위로 보지 않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종의 성취감으로 여긴다. 최신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운 경험에 돈을 쓸 때 비로소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트렌드소비형은 물질을 통해 삶의 만족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다. 최신 트렌드와 제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을 더 멋지고 성공적인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상징이 된다. 이들에게 소비는 순간의 기쁨을 넘어,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입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다.
이들은 저축보다 현재의 만족과 행복에 무게를 둔다. 자산을 모으기보다는 소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세속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서 가치를 찾는다. 그래서 매달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잡아가면서도 '나에게 맞는 가치 있는 소비'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는 작은 사치와 즐거움을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리고 싶은 것에 돈을 쓰자"라는 철학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트렌드소비형은 일반적인 소비를 넘어 사회의 흐름과 유행을 주도하며, 그러한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의 소비와 취향이 곧 자아의 일부분이기에, 순간의 소비와 만족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고, 그런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다.
트렌드소비형은 언뜻 보면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저 트렌드를 남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녹여내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유행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는 센스와, 이를 즉각적으로 반영해 남들보다 먼저 경험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유행을 좇는 것과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트렌드소비형은 새로운 영감을 주거나 창의적인 독창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트렌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자신을 그 안에 녹이는 데 능하다. 하지만 정작 그 트렌드의 시작점에 서거나 주도하는 인물은 되지 못한다.
이들의 내면적 갈등은 뭘까? 1인당 12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즐길 수는 있지만, 진정한 부유층의 은밀하고도 배타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느낀다. 남들보다 빠르게 유행을 좇으며 자신의 소비력을 과시하지만, 확실히 부자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경험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자신의 차에 장착된 옵션이 뭔지도 모른 체 자연스럽게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상류층만의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세련된 삶은 그들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비의 만족감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들은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자신이 욕망하는 삶은 뚜렷하지만, 그 목표의 스케일을 더 원대하고 화려하게 키우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수입과 지출 구조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작은 만족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누리는 소소한 행복과 사치에 만족하지만, 이 행복의 최대치나 깊이를 근본적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매달의 예산 내에서 트렌드에 맞는 소비를 충족하는 것이 우선인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업그레이드할 만큼의 여유는 없다. 이런 한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더 크고 화려한 삶을 꿈꾸면 곧장 현실에 발목 잡히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낀다.
결국, 트렌드소비형은 트렌드를 누리면서도 그 트렌드가 상징하는 최상위 삶과 자신 사이의 격차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더 큰 목표를 설정하기엔 현재의 여유가 부족한 현실에서 이중적인 고민을 끌어안고 산다.
몇 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초창기 유튜버들이 유튜브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각자 다른 이유가 있지만, 남들이 다 하니까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유튜브를 만든 창립자조차 유튜브를 전 세계 모든 방송사를 위협하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성장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동영상을 올릴 인터넷 공간이 필요했고, 한편으로는 남녀가 소개팅할 때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로 시작한 소박한 프로젝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목적의식이나 자본 없이 출발한 유튜브가 이제는 시대의 흐름을 이끌며, 전 세계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바꾸고 있다. 트렌드와 유행, 나아가 시대는 이렇듯 거대한 목표나 자본에서 비롯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트렌드소비형이 가진 희망적인 측면은, 그들이 트렌드를 소비하면서 시대를 읽어내는 감각을 훈련했다는 것이다. 최신 유행을 포착해 자신의 삶에 빠르게 녹여내는 능력은 경험과 감각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은 누구나 일정 수준에서 습득할 수 있는, 난이도가 낮은 일이다. 돈만 좀 쓰고 다니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습득한 감각을 재빨리 생산적인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금세 잃어버리고 만다.
트렌드소비형이 자신이 가진 감각들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려면,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남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최신 아이템을 구매하고 주목받는 것에서 그쳐선 안 된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즉각적인 만족과 사람들의 부러움, 달콤한 피드백을 포기할 용기도 필요하다. 트렌드를 창조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종종 남들의 만류와 비난을 감내해야 하며,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더러운 경험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트렌드소비형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방향이 결정된다. 지속적으로 유행을 소비하며 작은 성공과 순간적인 만족을 쌓아갈지, 아니면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고 트렌드를 주도해 나갈지, 그 선택은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Reference
황준선, 유희승. (2023). 경제활동인구의 돈에 대한 태도와 소비행동 유형. 주관성 연구, 65,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