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가족 사이가 달라지는 가장 간단한 말
명절에는 유독 "이름"이 사라진다. 가족 사이에서는 역할로 불리고, 혼자 보내는 연휴에는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하루가 이어진다. 오늘은 김춘수의 꽃에서 한 문장을 꺼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왜 관계를 바꾸는지를 이야기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물으면, 이 시가 빠지지 않는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의미부여의 힘을 말하는 건가?", "꽃이 된다는 게 뭐지?" 이런 생각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김춘수, 1922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부에 입학했으나,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퇴학당했다. 귀국 후 교사로 일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46년 등단했다.
<꽃>은 1952년,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에 쓰였다.
마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방과 후 어둑해지는 판잣집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 유리컵에 꽃 두어 송이가 담겨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속에서 꽃의 빛깔이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고,
시인은 훗날 회고했다.
그다음 날 혹은 이틀 뒤에 이 시를 썼다.
시의 첫 문장은 부재(不在)에서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이 없던 시절의 "그"는 존재하되, 의미가 없었다.
움직임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부르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리고 시는 반전한다. 시인은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게 불려지기를 바란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이 시가 70년 넘게 사랑받는 이유는,
골치 아픈 존재론적인 의미라든지 고뇌가 요구되는 철학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품고 있는 바람 하나를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꽃이 되고 싶다는 바람.
김춘수는 2004년 세상을 떠났지만, 이 바람은 여전히 살아 있다.
설 연휴, 사람들은 이름 대신 역할로 불린다.
"큰며느리", "셋째", "막내", "애 엄마", "형".
가족 안에서 역할로 호명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역할로만 불릴 때 생기는 미묘한 감정이다.
역할에는 기대가 붙어 있고, 기대에는 평가가 따라온다.
"며느리"로 불리는 순간, 이미 "잘하고 있는가"라는 채점의 대상 되는 듯하다.
혼자 연휴를 보내는 사람에게는 다른 종류의 부재가 있다.
하루 종일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시간.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 "고객님",
편의점에서 "감사합니다".
이름이 사라진 익숙한 하루는 유독 명절에는 마음을 긁는 듯하다.
김춘수의 <꽃>이 말하는 건,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상대를 역할이 아니라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큰며느리"가 아니라 "수진아",
"셋째"가 아니라 "민호야"라고 부르는 순간,
역할의 무게가 잠시 내려간다.
그 사람이 "하나의 몸짓"에서 "꽃"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시의 진짜 힘은 3연에 있다.
시인은 남을 꽃으로 만들어준 뒤, 자기도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이건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내가 너를 알아봐 주듯, 나도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명절에 지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남의 이름은 부르지만, 정작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
관계가 좋아지는 기술은 복잡하지 않다.
역할 대신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게 김춘수가 70년 전에 써놓은 답이다.
오늘 가족이나 지인 중 한 사람을, 역할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보자.
"OO이 엄마" 대신 "OO아",
"형" 대신 이름.
어색하면 대화 중에 딱 한 번만이라도 괜찮다.
"OO아, 요즘 어때?" 이름이 들어가는 순간,
대화의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한 번쯤 엄마에게 "~여사"라 부르며 장난을 치는 것도,
'엄마'라는 꽃 같은 존재를 온전히 아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꽃 같은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혹은 소중한 모든 이들에게도 이름을 선물해 보자.
그날만큼은 그 호칭이 버릇없는 농담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으로 부르는 가장 순수한 언어가 될지도 모른다.
혼자 연휴를 보내고 있다면, 오늘 스스로에게 이름을 불러보자.
머릿속으로 "○○아, 오늘 하루 수고했어"라고 말해보는 것.
오글거리고 유치해 보여도 괜찮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잠들기 전, 이 질문 하나.
"오늘 나는 누구의 꽃이 되었을까?"
대답이 쉽게 떠오르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 질문을 품는 것 자체가, 꽃이 필 씨앗을 심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다음 편 예고
"일어난 일은 언제나 잘된 일이다" — 법정스님의 한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