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방문객>, 사람 만남이 버거운 날

명절 만남에 지치지 않는 환대의 기술

by 황준선

명절이면 사람을 만난다. 반가운 얼굴도 있고,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워지는 얼굴도 있다. 혼자 보내는 사람에게는 만남 자체가 그리우면서도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정현종의 방문객에서 한 문장을 꺼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덜 닳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의 자취

철학을 공부한 시인이 있다.

정현종,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생명과 사람, 그리고 사물 사이의 교감을 줄곧 노래해 왔다.


「방문객」은 2008년 출간된 시집 [광휘의 속삭]에 수록된 시다.

오랫동안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읽히던 이 시는,

2017년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주인공이 낭송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나름의 유명세를 얻었다고 한다.

(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다고 들었어요)


시의 첫 문장은 단순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유가 뒤따른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아름답다.

그런데 시인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이 한 줄에서 울림을 느껴졌다.


사람이 온다는 건 일생이 오는 것이고,

그 일생 속에는 이미 깨져본 적 있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


정현종은 그걸 알아본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바람처럼 상대의 마음 갈피를 조심스럽게 더듬어보는 것.

그것이 정현종이 말하는 환대(welcome)다.


만남이 소모적인 이유

설 연휴, 사람을 만난다.

친척, 가족, 오랜만에 보는 지인.

기대 반, 걱정 반.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왜 이렇게 지쳐 있을까.


사람을 만나는 일이 피곤한 건, 만남 자체가 힘들어서가 아니다.

상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표현대로라면,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냥 "그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과,

지금 안고 있는 고민들과,

앞으로 걸어갈 불확실한 미래가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명절 만남은 이 무게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요즘 뭐 해?", "결혼은 언제?", "아이는?"

이런 질문들은 상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줄로 압축해 버린다.

한 사람의 일생을 카테고리 몇 개로 분류하는 셈이다.


반대로, 내가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유독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의 복잡한 사정이 한 줄짜리 대답으로 납작해지는 느낌.

한 사람의 일생이 왔는데,

아무도 그걸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느낌.


혼자 명절을 보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남이 없어서 편한 게 아니라,

"만나면 또 닳겠지"라는 예감 때문에 만남 자체를 피하게 된 경우가 많다.


정현종은 이 문제에 대해 놀랍도록 간결한 해법을 제시한다.


환대.


환대는 거창한 게 아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바람을 흉내 내는 것"이다.

바람은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바람은 사람의 결을 따라 움직인다.


상대가 어떤 상태로 왔든,

그 상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는 것.


"요즘 어때?"라고 물은 뒤, 대답을 기다리는 것.

대답이 짧아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

침묵이 어색하지 않게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게 환대다.


그리고 이건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연휴 동안 지친 나 자신에게도 같은 환대가 필요하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대신,

"사람의 일생을 여러 개 만났으니 당연하지"라고 인정해 주는 것.

내 마음도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jpg

연휴 연습

오늘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에게, 판단 없이 들어보자.

"요즘 어때?"라고 묻고, 대답이 끝날 때까지 다음 질문을 참아보자.


혼자 연휴를 보내고 있다면,

연락이 뜸해진 사람 한 명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보자.


"잘 지내?"면 충분하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안부.

그것도 환대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오늘 나는 어땠어?"

대답이 뭐든, 거기서 멈추면 된다.

그게 나에게 바람이 되어주는 일이다.


다음 편 예고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김춘수의 한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시리즈가 마음에 닿았다면,

비슷한 결의 문장들을 더 모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데 사람이 힘든 사람, 만남 뒤에 혼자 복기하느라 더 지치는 사람,

괜찮냐는 말에 "응" 하고 돌아서서 한숨 쉬는 사람.

그런 당신이 펼쳐놓고 쉬어가도 좋을 책입니다.


착하고, 섬세하고, 독특하고, 완벽주의자인 당신을 위한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