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처음처럼>, 다시 시작이 두려울 때

연휴 다음 날이 부담스러운 당신에게 건네는 한 문장

by 황준선

연휴 다음날은 왜 설레기보다 부담스러울까. 작년에도 세운 계획, 올해도 비슷한 목록. 시작이 두려운 건 실패한 시작이 너무 많아서다. 오늘은 감옥에서 20년을 보낸 사람이 쓴 한 문장에서, 시작을 다시 가볍게 만드는 법을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신영복의 자취

이 문장을 쓴 사람의 이력은 묵직하다.

신영복, 1941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랐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뒤,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 되었다.


스물일곱 살, 장래가 창창하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구형되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것이다.

그리고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 그 사이 5년은 독방이었다.

스물여덟에 들어가 마흔여덟에 나왔다.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지인들에게 보낸 230여 장의 편지를 모은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 시대의 고전으로 불린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경제학, 동양고전, 서예를 가르쳤다.

그의 붓글씨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로 불리며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가 바로 그의 것이다.


저작권료를 받는 대신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 원을 기부했다.

서민의 술에 자신의 글씨가 쓰이는 걸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2007년,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을 펴냈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 한 문장.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20년을 갇혀 있던 사람이 "시작"을 말한다.

그것도 한 번의 거대한 시작이 아니라, "수많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의 무게는 거기서 온다.


신영복은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았고,

2016년 1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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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무거워지는 이유

설 연휴가 끝나면, 사람들은 시작을 결심한다.

새해 계획, 다이어트, 운동, 이직 준비, 자격증 공부. 목록은 익숙하다.

작년에도 비슷한 것을 썼으니까.


문제는, 시작 자체가 아니라 시작에 붙어 있는 무게다.

"이번에는 끝까지 해야 해", "작년처럼 흐지부지되면 안 돼", "진짜 마지막 기회야."


시작에 과거의 실패를 붙이는 순간,

시작은 도전이 아니라 빚 갚기가 된다.


신영복의 문장이 여기서 갈라진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산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에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뉘앙스가 있다.

지금까지의 시작은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다르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이 곧 수많은 처음"이라는 말에는

실패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시작하고 멈추고 또 시작하는 것 자체가 삶이라는 뜻이니까.


이걸 명절에 대입해 보자.

가족과 함께 있으면, "올해는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이 온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그럴듯한 계획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신영복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도 하나의 시작이고,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다.

거창한 계획이 없어도 이미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혼자 연휴를 보내는 사람에게 이 문장은 다르게 작동한다.

혼자라는 건 남의 시간표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처음'을 조용히 만들 수 있는 시간.


새해 첫날에 거창한 걸 시작할 필요 없다.

읽고 싶었던 책의 첫 페이지를 펴는 것,

오래 연락하지 못한 사람에게 안부를 보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처음이다.


시작을 가볍게 만드는 법은,

시작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한 번의 완벽한 시작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처음.

그게 신영복이 소주병에 새긴 '처음처럼'의 진짜 뜻이다.


다음 편 예고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것들 — 나태주의 한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




연휴 동안 이 시리즈와 함께하고 있다면, 같은 마음으로 쓴 책 한 권을 권합니다.

시작은 늘 하는데 끝을 본 적이 없는 사람,

올해도 작심삼일이 될까 봐 아예 계획을 안 세우는 사람,

다시 시작하는 게 창피해서 멈춰 있는 사람.

그런 당신의 '처음'을 응원하고 싶은 책입니다.

착하고, 섬세하고, 독특하고, 완벽주의자인 당신을 위한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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