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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Sep 26. 2024

남자다움에 대한 고찰

아빠가 되고 보니

2024. 9. 26. (목)


군 입대할 무렵 54kg였다.


당시 키가 177cm였으니 얼마나 말랐는지 감이 오시려나. 그래도 그때는 키라도 컸지.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키가 140대였고, 빈혈이 있어 횡단보도를 건너다 자주 눈앞에 하얘져 도로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곤 했다. 태권도 학원에 가면 코피가 나고, 축구나 농구를 하면 뼈가 젓가락처럼 부러지곤 했다. 성격도 소심해서 사람과 대화하기보단 책을 좋아하고, 대중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약하고 비실거리고,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난 스스로를 남자답다는 말과는 너무나 먼, 반대쪽 끝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직접 말은 안 했겠으나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답다'는 말은 뭔가, 팔뚝도 굵고 목소리도 크고 피부도 거뭇거뭇한 그 누군가를 말하는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남자답다는 것, 아빠가 되고 보니...


그렇게 남자답지 못한 나도 어찌어찌 사랑스러운 한 여자를 (속여서) 유혹(?)해서 결혼도 해내고, 아내를 닮아 귀엽고 예쁜 두 아이를 낳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히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나를 포함해서, 일반적인 겉모습이나 첫인상이 '남자답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달까. 키가 작고 피부가 새하얗고 몸이 마르고 힘이 없어도, 책임감 있고 우직하게 아내를 아끼고 아이들을 돌보며 열심히 일하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작은 거인처럼.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이고 가지지 못했던 시각인데,  나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어 다른 가정의 사람들을 종종 만나 관계를 맺다 보면, 많은 말 하지 않아도 오래 지내보지 않아도 함께한 아내의 표정이나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은 작고 말랐지만 이 가정의 거인이구나.


책임질 줄 안다는 것


'남자답다'의 기준은 겉모습이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내면은 짧은 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간 살아온 삶의 흔적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책임감,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어떤 상황에도 예의와 평정심을 지킬 수 있는 인내 등등. 유려하게 호수를 거니는 듯 하지만 물 밑에선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버둥 치는 오리처럼,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지켜나가는 수많은 '남자다운' 아빠들이 있는 것이다.


'어떤 아빠가 되고 싶냐'는 물음이 주어지고, 축구선수 호날두처럼 매력적인 외형을 가진 '늙지 않는' 멋진 아빠와 앞에서 말한 '작은 거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작은 거인을 택할 것이다.


....라고 쓰고 보니 아내는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서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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