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농사 초대박

by 봉천동잠실러

2026. 2. 9. (월)


자식 농사?


밤 9시. 첫째와 둘째를 재우고 나오니 옆방도 조용한 것이 아내와 막내도 잠들었나보다. 물 한 잔을 들이키며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기사를 보는데, 유명 연예인의 자녀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과 함께 '자식 농사 초대박'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농사도 아니고 자식 농사가 초대박 이라니... 제목부터 이목이 집중되고 괜스레 부러웠다.


Daum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농사는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어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식 농사는 무엇일까? 부모가 농부고, 논(또는 밭)은 세상이며, 씨는 자식이고, 가꾸는 것은 육아라고 생각하니 나름 자연스러워 피식 웃음이 나다가, '거두는 것'에서 흠칫 생각이 멈췄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정말 농사라면, 육아에 있어 '거두는 것'은 무엇일까? 더 발칙하게는, 무엇을 거두어야 나의 자식 농사가 '초대박'이 되는 것일까? 아니 내 자식은 아직 어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나를 키운 우리 부모님의 자식 농사는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까?


처음 기사를 읽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내가 직접 농산물이 되고 보니 마음이 꽤 불편했다. 나는 몇 점짜리 농산물이고, 우리 부모님은 몇 점짜리 농부인 건가 싶어서 말이다.



존중, 그리고 행복할 자격에 대하여


내겐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때인가. 아빠가 주말에 나를 부르시더니 차로 데리고 가셨다. 말없이 차 트렁크를 열어 새 농구공을 건네주시고 다시 말없이 들어가셨다. 당시 농구에 흠뻑 빠져 농구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엄마는 빼빼 마르고 약한 몸으로 무슨 농구냐며 반대하셨다. 그런데 아빠가 그 얘기를 들으시고 농구공을 사서 주신 것이다. 이후 농구 학원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년 만에 나는 주장이 되었다. 공부는? 물론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빠는 한 번도 내게 '공부 좀 해라'라고 잔소리하신 적이 없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빠와 등산을 하며 "아빠 그때 왜 공부하라고 안 했어?"라고 넌지시 물었을 때, 아빠는 "네가 행복해 보였어. 자식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싶어서."


'그 농구공이 뭐라고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아빠의 대답을 듣고서야 조금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내게 건네준 농구공은 자녀인 나에 대한 '존중'이었고, 말없이 돌아서는 아빠의 뒷모습은 '응원'이었으며, 그 존중과 응원의 토대 위에 이후 농구를 하며 행복했던 기억들이 나의 자존감을 형성했던 것이다.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최고가 아니어도 행복한 사람이 되다


다시 기사로 돌아와서, 지난 30여 년의 내 삶은 비교와 평가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초대박은커녕 대박 근처도 가지 못했다. 최고의 대학에 가지 못했고, 최고의 직장도 가지 못했으며, 최고로 돈을 많이 벌지도, 최고의 명예를 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교와 평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는 애매한 실패작이고, 우리 부모님도 초대박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씁쓸한 농부가 되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부모님은 나를 존중했고, 그 존중의 기억들은 실패와 좌절의 순간마다 다시금 나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나며 지금껏 살아왔고, 평범하디 평범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도 내 삶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나는 최고가 아니어도, 초대박이 아니어도, 심지어 대박조차 아닐지라도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은 나를 초대박 농산물로 만드는 데는 실패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자식 농사 초대박


나도 자식 농사를 짓는다. 다만, 내가 짓는 자식 농사는 세상이라는 논이나 밭에 자녀들을 뿌리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자식이 곧 논이고 밭이다.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논과 밭에 존중과 응원의 씨앗을 마음껏 뿌리고자 한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 아이들을 뭐라고 평가하든, 이 아이들이 부디 각자 가진 기질대로 또 각자 느끼는 행복의 방향대로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우리 똑순이 첫째 꿀떡이, 귀염둥이 둘째 찰떡이, 복덩이 막내 꼭꼭이까지. 점점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의 기준에서 대박을 치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이 내게 실패한 부모이자 농부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괜찮다. 이 소중한 아이들,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논과 밭인 이 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세상 속에서도, 어떤 기준 앞에서도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길 바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내 자식 농사는 초대박이다.


그 염원을 담아 새롭게 맞이하는 내일도 아이들을 힘껏 존중해야지.


일단 막내 몸무게는 초대박인데...(상위 1% 몸무게와 머리크기)
격렬하게 존중하는 중 (Feat. 아빠, 누나, 형...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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