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이력서

by 봉천동잠실러

2026. 2. 1. (일)


정신을 차려보니 2025년은 일찌감치 갔고, 새해 첫 달은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지나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둘, 셋 낳으며 살다 보니 시간이 더 빨리 가는 느낌이다. 지난주에 아이들을 데리고 눈썰매를 타고 왔는데, 다섯 식구가 복작복작 살아가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인생이 마치 눈썰매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가족은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걸까 싶기도 하고.


애가 셋이라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각기 다른 인생이 다섯 개다.

유치원생 첫째와 어린이집 둘째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4개월을 갓 넘긴 셋째도 먹고 자고 싸며 무럭무럭 성장하느라 바쁘다. 아내도 출산 후 몸을 회복하며 막내 수유를 하고, 나도 어느덧 복직이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부모 포함 다섯 인생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니 다양한 감정이 수시로 엮이곤 하는데,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아이들 사춘기 무렵이 되면 온 집안이 시시각각 난리가 나겠다 싶다.


얼마 전 아내가 유명 번역업체로부터 이력서 요청을 받았다.

아내는 둘째 임신 때 번역대학원을 다녔는데, 이후 몇 번 단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셋째 임신으로 한동안 번역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1년 정도 재택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업체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었다. 아내는 며칠 고민 후 "나 이력서 냈어"라며 덤덤하게 말했는데, 그러면서도 끝에 "합격한단들 할 수 있을까?"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내가 왜 고민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코로나 때 재택을 해봤지만 쉽지 않다. 아무리 아이들이 기관을 다니고 막내가 어리다고 하더라도 육아는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신생아만 보더라도 때에 맞춰 이유식도 전환하고, 그에 맞춰 단유도 해야 한다. 큰 아이들 유치원, 어린이집 준비물에 공지도 챙겨야 하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 종종 가정보육도 해야 한다. 그리고 계절별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이런저런 행사도 많아서 참여해야 하고, 각기 다른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세 아이 예방접종도 까먹으면 안 된다. 종종 있는 가족 행사와 같은 외부 일정을 모두 배제하고라도, 육아만으로도 인생은 가득 차고 넘친다. 거기에 더 얹어 재택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초인적인 집중력과 분별력을 요하는 것이다.


아내의 이력서가 '아내의 도전'이 아닌 '우리의 도전'이었으면 좋겠다.

이왕 이력서를 제출했다면,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차게 도전하고 만약에 이번 기회에 안되더라도 다음에 또 이력서를 냈으면 좋겠다. 합격해서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면 그에 맞게 부부로서 '함께' 여러 어려움들을 헤쳐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세 아이들과 지금을 추억할 때, '더 도전하지 못한 아쉬움' 같은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실패해서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을 안주 삼아 깔깔거리며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빠는 계속 도전했노라고.


나는 그런 모습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세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학군지로 이사 가는 것보다, 비싼 학원보다, 영재 교육보다, 우리가 부부로서 또 부모로서 살아가며 부딪힌 수많은 도전의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가 더 큰 교육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이력서는 단순히 아내 혼자 외롭게 우두커니 선 채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옆에 내가 있고, 그 옆에는 성깔 있고 오동통한 세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새벽에 수유하며 내 글을 가장 먼저 읽는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응원의 마음이 닿았으면 좋겠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의 도전을 외롭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어떠한 도전도 외로울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내가 함께 할 테니.


우리 엄마 이력서 꼼꼼히 봐요. 우리 맘마 많이 먹었어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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