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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Jan 29. 2023

육아휴직, 주부의식을 가지다

회사에선 주인의식, 집에선 주부의식

2023. 1. 29. (일)


"이건 왜 이렇게 해놨어?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회사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릇이 쌓여있는 형태가 위험해 보이는 것, 건조물 분류 위치 등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을까' 싶은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말하면 딱히 시원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매사에 논리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꽤나 답답한 일이었다.


뭐 답답하긴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단' 아내의 원칙을 묵묵히 따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집안 살림에 있어서 '초보자'이니까. 첫째가 태어나고 아내가 출산 및 육아휴직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집 안에서의 일은 아내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배치하고 운영해 왔다. 나는 그 안에서 살았을 뿐이고. 


그러니,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도 일단 가만히 있다가, 이른바 '짬밥'이 차고 나면 아내에게 조심스레 건의를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군대 때의 이등병, 회사에서의 신입사원 마인드로 접근을 했다. 그리고, 육아휴직을 하고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은 지금, 나는 결코 저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바깥사람이 아니라 안(內)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둘이 하루종일 공동 육아를 하며 이른바 현장직 근무를 해보니, 육아의 현장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중 하나로, 아이는 정말 한 시도 '혼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내가 같이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아내가 외출했을 때는 나 혼자 화장실도 가기 힘들었다. 뽀로로를 틀어주면 가능한 경우도 있었는데, 가끔 그마저도 통해지 않을 때는 화장실 문을 열고 소변을 봐야 했고, 그걸 아이가 신기하게 문 앞에서 쳐다보는 굴욕적인 경험도 하게 되었다. 군대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고.... 너무해...


부엌에 대해서도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 이유식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해 이전에는 서성이지도 않던 부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로, 이유식 그릇은 식기세척기를 돌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구분되어야 하고, 매우 자주 쓰이는 그릇들은 빨리 꺼낼 수 있게 바깥쪽에 배치되어야 한다. 어차피 아기 그릇들은 유리나 사기 종류가 없어서 떨어져도 무방하다. 건조물도 예쁘게 배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 사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위주로 위아래로 놓아 쓰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리고, 아이를 혼자 보다 보면 솔직히 예쁘게 배치할 시간도 없고 배치해 봐야 효율적이지도 않다.


직접 안에서 경험해 보니, 바깥사람으로서 집 안을 바라볼 때와 관점이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다. 


청소를 다 한 직후 뒤를 돌아봤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아... 딸아... 그건 또 어디서 난 거니...




재미있게도,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입사 후 예전 변호사님들이 검토한 계약서를 검토하다 보니 거슬리는 것이 많았다. '왜 이렇게 했지?'라는 생각이 자주 들 정도로 우리 회사에 불리한 조항들이 많았는데, 이미 체결된 계약이니 어쩔 수 없다며 열심히 유관부서에 내용을 교육하고 필요하면 설득까지 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예전 변호사님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업 간 계약을 체결할 때, 조항 별로 법적인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영역이 아니다. 진짜는 협상인데, 이때 각 당사자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엮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협상할 당시 우리 회사는 사업 구조 등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협상력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예전에는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심지어 계약을 체결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상대 회사와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와. 이거 장난 아니구나' 싶었고, 그제야 이전 사람들의 고민과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제야, 이전 계약서들이 단순한 글자가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관점이 바뀐 것이다. 회사 바깥사람에서 안 사람으로




집 안에서 하는 육아도, 집 밖에서 하는 회사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그 일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아휴직 전 나의 같잖은 지적질에 화내는 대신 적당히 무시하고 기다려 준 아내가 새삼스레 고맙다. 반대 입장이었으면 나는 아내에게 장문의 의견서라도 썼을 거다.


회사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한다. 일을 대할 때 내가 '주인'인 것처럼 일하라는 것인데, '주인의식'까진 모르겠지만 나도 회사에서 일할 때 내가 담당하는 계약이나 자문 시간이 지나 나중에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회사 계약이나 법적 이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많이 알게 되었고, 새로 입사하시는 분들에게 오리엔테이션도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내 일도 바빴는데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하겠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육아휴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부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몇 개월 후에는, 부엌까지 포함한 집 '안'의 모든 영역에서 아내와 '논의'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온라인 가나다' 게시판 상담사례를 보니, '주부'라는 자체가 아내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남자를 전업주부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집안일을 전문으로 하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 별도로 사전에 없으나 '가사 전업 남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있다고 한다.


난... 적절하지 않아도 그냥 주부를 쓰도록 하겠다. 


https://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241430&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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