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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천동잠실러 May 16. 2023

남편이 빨래하다 혼나는 이유

집안일에도 타이밍이 있다.

2023. 5. 16. (화)


"빨래를? 지금?"


육아휴직 후 아내와 공동 육아를 하며 가장 많이 혼났던 이유가 '때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저녁 늦게 빨래를 돌린다거나 ("건조는 새벽에 일어나서 하게?"), 저녁식사 직전에 화장실 청소를 하려고 준비하는 것 ("국 다 식네? 그리고 어차피 밥 먹고 애기 씻겨야 하는데?"). 매번 혼나면서도 고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금 돌아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참 억울했더랬다. 대체 왜 저녁식사 직전인데 수저를 놓을 생각은 안 들고 화장실 물 때가 더 눈에 들어오는 걸까. 


꼭 저녁 먹을 시간만 되면 내 눈에 띄는 장면들 (Feat. 글을 쓰는 지금도 새벽에 빨래 개는 중)



'큰 그림이 없어서 그래요.'


많이 혼나본(?) 남편으로서 변명을 하자면, 직장(집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집 안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다. 군대로 치면 이등병, 회사로 치면 신입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 일을 왜 '지금', 왜 '이렇게', 그리고 왜 '내가' 하는지를 큰 그림 안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직 후 초반은 이것저것 섣불리 판단하기보다, 아내가 그간 꾸려온 '집안'에 녹아들기 위해 일단 시키는 대로 하며 하나하나 관찰하고 질문하며 배워야 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머. 이건 개선해야 해'라는 개선(改善) 장군 마인드가 이상하게 작동하면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것. 실력은 이등병인데 의지만 오성장군인 채로 지엽적인 지적질을 하거나 맞지 않는 고집을 부리다 사고를 치거나 쓸데없이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집안에 개선할 점이 있을 수 있다. 아내가 놓친 게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걸 고치는 시점이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고, 무엇보다 그걸 고치는 사람이 아직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걸 왜 이렇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는 아직 이르다. '이래서 이렇게 하게 되었구나'가 보여야 비로소 큰 그림 안에서 그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아빠 또 저녁 먹으려는데 빨래 돌리려고 했어? (한심)'


'회사일만 일인가? 집안일도 일이다.'


고맙게도 아내는 내가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물면서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물론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레이저 눈빛을 쏘곤 했지만. 나도 휴직 초반에는 몇 번 고집을 부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부분 아내의 지적이 맞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아내와 대화를 하며 하나하나 맞춰갔다. 그렇게 휴직 후 5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로 말하지 않아도 '지금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일치하게 된 것이다 ('나는 둘째 쪽쪽이를 소독할 테니 너는 첫째 밥을 차리거라. 빨래는 제발 낮에만').


맞벌이든 외벌이든 아니면 우리집처럼 일시적으로 공동 육아휴직 중인 가정이든, 집안일에 대한 호흡을 서로 맞추기까지 남편과 아내 간의 많은 대화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남편이든 아내든 집 밖에서 주로 생활하는 사람은 집 안에서의 규칙과 흐름을 존중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회사에서 불만이 있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고 무턱대고 다 고치자거나 잘못되었다고 들이대지 않듯이


회사일만 일이 아니다. 집안일도 엄연한 일이다.


5개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가끔 혼나는 중 (꿀떡아. 아빠 또 혼났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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