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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일기 #에세이#글#일상#의식의 흐름

by 공영

-1.

오늘 하루, 조울의 정점을 찍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은데(그런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있다보니, 생각에 묻히게 되고 그러다보니 삶을 부정하고, 우울의 끝을 보려는 미친 사람의 표본 같았다. 그렇게 저녁 때까지 멍 때리다 울고 다시 멍 때렸다. 도망은 가지 못 하는 쫄보지만 용기내어 엄마에게 말했다. "나 잠깐 바람 쐬고 와도 돼?(그러니까 엄마가 애기랑 있어.)" 딱 거절당했다. 당신은 나와 동생이 애기 정도의 나이즈음 어딜 떼놓고 가본 적이 없었다고. 그래서 이러다간 진짜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늦저녁에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퇴근하신 후 엄마의 따가운 시선을 안주삼아 맥주 두 캔을 마셨다.


-0.5.

맥주 두 캔에 취하는 쉬운 인간은 아니었다. 잠수를 타고 임신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하며 심해에 잠겨있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술이 약해졌지만, 술이 허용이 되는 날엔 달린다. 술이 좋다. 나는.


내 부모는 굉장한 사람들이다. 정점을 찍은 적은 없지만 나락은 찍은 내 삶을 그래도 안고 가주시는 분들이다. 존경을 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류의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난 내 부모께 감사하고, 내 부모를 존경한다. If, 내 자식이 나와 같다면 난 뒤돌아서 내 갈 길을 갔을 것이다. 그래도 맞지 않는 건 사실이다.


0.

난 늘 의식의 흐름대로 무언가를 적어내려가지만, 오늘도 역시 의식의 흐름의 정점을 찍는 것 같다. 일기 문단 구분용으로 숫자를 적는데, 그런 경우는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쓰겠다는 의도가 낭낭한 경우다.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거기에 스타우트 두 캔을 마셨고, 상쾌하게 양치도 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수가!


양치를 하면서 거울을 봤는데, 백수 생활을 한 일주일 했더니 묘하게 피부가 한 톤 밝아진 기분이 들었고, 탈색과 염색으로 난리를 쳤던 머리칼이 블랙으로 가라앉은 내 얼굴을 보니 "씨발 존나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해봤다. 내 삶은 정말 찌린내 풀풀나는 시궁창이고, 난 이미 사랑에 기만당했고, 결혼에 실패를 했기에 딱히 사랑에 거는 기대도 없고, 내 아들은 귀엽지만 내게는 그게 다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시궁창이어도 존나 멋있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어찌 됐든 두가지로 귀결된다. (재능은 없지만 사랑하는)음악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그림.


1.

난 팔자 좋은 백수가 꿈이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태어난다면, 마다가스카르의 거북이나 푹신한 이불, 부잣집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하는 정말 게으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내 성향이 달라진 게 있다면, 나락의 정점 이후, 집에만 있는 하루가 너무나도 괴로워졌다는 것이다. 집에만 있으면 몸에 사무치게 다가오는 '주옥'같은 현실의 조여움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우울은 내가 무언가를 뱉은 행위의 동기부여가 되었었다. 그래서 난 그 우울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스물 일곱의 나는 좀 다르다.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기계적인 노동이든, 기타를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든. 진짜 삶이 똥이 되어보니 이렇게 변했다. (자살을 피하기 위한 자위로 보이기도 한다.) 일주일 정도 백수 생활을 했는데, 맞지 않다. 얼른 연휴가 끝나고 출근하고 싶다.


5.

내가 사랑하는 숫자.

내게 안정감을 주는 것들.

5. 삼각형. 달. 고래. 블랙. 블루. 음악.

나는 프랑스에 갈 것이다. 꼭. 내 삶의 마침표, 혹은 행복의 시작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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