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파마와 매립지의 제로웨이스트 도전일기_첫번째 이야기
일단 밥부터 먹고.
말하지 않아도 밥부터 먹게 되는 모임이 있다. 밥을 먹고 나니 커피도 마셔야 되고.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에피소드 업데이트도 해야 하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모르던 사람들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시를 읽던 사람들과
일주일에 두 번, 가끔은 세 번 정도 밥을 먹는다.
정 없이 밥만 먹을 수 없으니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지, 주절주절 떠들다 보니 밥까지 먹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일까. 중요한 건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 이제와 생각해 보면 너무 잘 통한 게 문제였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채식 프로젝트를 했다. 친구의 말처럼 고통을 즐기는 타입인 건지, 생활에 제약을 가하는 프로젝트가 싫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을 발견하는 것도 신기했고, 내가 나를 참 모른다 싶었던 순간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지독하게 넓다는 깨달음도 나쁘지 않았다. 참는 것보다 발견하는 게 많았다. 그러다 보니 누가 시키지도, 감시하지도, 티 내지도 않는 혼자만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앞으로도 채식을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냈으니, 이쯤에서 해피엔딩 하면 좋았으렸만.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는 욕심 많은 인간인 나는 ‘제로 웨이스트’를 입에 담고 말았다.
“저도 한 번 해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서운 말이다. 나야 내 손으로 무덤 파는 게 특기라지만 그 무덤에 같이 와서 누울 것까지야. 그렇게 내가 뱉은 말에 끌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제로 웨이스트 실천이 싫은 게 아니다. 공포에 질렸을 뿐이다.
2020년 일 년 동안 제로 웨이스트를 함께 실천하기로 한 날, 집으로 돌아온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막막해졌다.
‘화장실 휴지는 어떡하지?’
첫 번째 공포는 변기 위에서 시작되었고, 끝날 때까지 나를 공포에 밀어 넣을 게 틀림없다. 완벽이 아닌 줄이는 게 목표라고 하긴 했다만 성격상 찝찝한 실패로 기억될 터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쓰레기는 넘치고 넘쳤다. 혼자 먹기 좋은 샐러드도 플라스틱과 비닐 포장이 되어 있었고, 매일 마시는 차 역시 개별 포장이다. 어디 주방뿐인가. 조금 귀찮다고 물티슈로 먼지를 닦아 내고, 편리한 인터넷 쇼핑은 막대한 포장 쓰레기를 내놓았다. 꼼꼼히 포장된 택배를 보며 얼마나 많은 감탄을 내뱉었던가. 넘치는 쓰레기 앞에서 대체 왜 제로 웨이스트를 하려고 한 건지 조차 잊어버렸다.
막막함이 오로지 내 몫은 아니었던 건지, 함께 하기로 한 동친(동네 친구) 역시 감이 잡히지 않는다며, ‘나는 쓰레기 없이 살기로 했다.’ 책을 보며 공부와 토론을 해보자고 했다. 예상과 다르게 책을 읽고 나자 일말의 감마저 사라졌다. 미국의 실정에 맞는 책일뿐더러 생활 패턴 역시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시 제자리. 우리는 우리대로 잘해보기로 했다. 그 후 만날 때마다 쓰레기 이야기를 나눴지만 여전히 막막했다. 시작은 시작일 뿐이고, 결심만큼 되돌리기 쉬운 게 없다만 우리는 굳이 고행길을 걷기로 했다.
그렇게 밥을 먹던 목요일 저녁은 제로 웨이스트 회의로 바뀌었다.
확연한 목표 없이 대화를 지속하는 기간 동안 나는 택배를 끊었고, 동친은 재래시장을 다녀왔다. 자신에게 가장 큰 모험이 되는 부분부터 시작한 셈이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동친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친에게만 과제를 주는 것은 어떨까. 음식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쓰레기도 함께 가져가기도 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괜찮은 방법을 발견한 것 같다. 그러자 동친은 보란 듯이 ‘제로 웨이스트’를 선언하며 모임에 올 때는 두 손을 가볍게! 혹은 병에 담긴 것만! 공지를 날려버렸다. 아.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두리뭉실 “우리 때려치울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동친에게 이끌려 포기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쨌거나 쓰레기를 줄이는 건 중요한 일이고,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다. 의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줄이려 하니, 불가능하다며 손사래 치면서도 이미 발을 디딘 게 틀림없다. 문제는 시작단계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것.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이 이야기만 할 것 같아서, 우리 생활을 제대로 점검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과제는 소유 목록 정리하기.
내 방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원룸이다. 짐의 절반은 본가에 있으며, 많이 사는 만큼 많이 버리는 게 나의 특기다. 은근 미니멀리스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적어가다 보니 끝도 없다. 심플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호더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내 목록을 보고 동친이 생각보다 옷이 많지 않다고 해준 덕분에 살짝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계절마다 택배를 오가니 사분의 삼은 본가에 있다만) 앞으로 최소한으로 구매한다고 할 지라도 지금 있는 물건을 소진하는 것만으로도 쓰레기가 많이 나올 터였다. 플라스틱은 왜 이렇게 많고, 안 쓰는 건 또 어찌나 많은지. 갑자기 방 안이 쓰레기통으로 느껴졌다. 쓰레기를 없애는 것보다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쓰레기 없이 사는 게 과연 가능하긴 할까.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을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찾아오기도 했다. 신념을 지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지만 과연 내게 진심 어린 신념이 장착되긴 한 걸까. 세상에나. 아직 감수하지 않은 불편으로 질리도록 투덜대는 게 가능하다니. 나의 나약한 의지에 새삼 놀랐다. 나약한 게 마음뿐 일까. 제로 웨이스트를 선언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벼르고 벼르던 의자까지 덜컥 샀다. 꼭 필요할뿐더러 배송은 시키지 않았다는 어쭙잖은 변명과 함께 어마 무시한 포장 쓰레기가 나왔다.
우리는 소유 목록 정리 동시에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다.
체크리스트는 기존에 지키고 있던 사항들, 제로 웨이스트 기간 동안 도전하고 싶은 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일을 꼽아보는 거였다.
자학은 실컷 했으니 칭찬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말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배달 음식을 먹지 않고, 텀블러를 사용하고, 물을 끓여 먹고, 섬유 유연제를 사용하지 않고, 분리수거를 하고, 튜브형 화장품을 잘라 쓰기까지. ‘나 정말 알뜰한 사람이구나.’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일관성이 없는 나의 행태를 두고 동친은 신기한 사람이라며 감탄했다. 동친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결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 건지, 한국인이라면 이 정도는 다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나쁜 건 아니니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
도전하고 싶은 것들은 나뉘었는데, 나는 인터넷 쇼핑을 끊고 싶어 했고, 동친은 대체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미 동친이 사용하고 있는 생리컵과 천 생리대를 나의 도전 목록 중 하나다. 작년부터 써봐야지, 결심만 하고 아직도 쓰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동친이 사용하지 않는다며 손수건에 곱게 싸준 일회용 생리대를 다 소진하고 난 뒤의 일이겠지만.
도무지 힘들 것 같은 과제는 화장실 휴지를 쓰지 않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 원룸에 비데를 설치하는 것도 조금 웃기지만 비데를 좋아하지도 않으니, 그렇다고 손으로 닦을 수도 없고. 이쯤 해서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다. 택배를 포기하는 것도 힘들 것 같다. 인터넷 쇼핑은 관둔다 할 지라도, 계절마다 옷 정리를 해서 안 입는 옷은 본가에, 입는 옷은 원룸에 두는 시스템을 포기할 수 있을까. 복잡한 게 싫어서 커다란 옷장도 안 샀는데. 택배 박스를 몇 번이고 이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게 최고의 방안이겠지만 당분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역시 쉬운 일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의 '제로 웨이스트'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의 프로젝트다. 우리의 의도에 공감하면서도, 무덤엔 결코 눕지 않겠다고 우기는 한 사람이 더 있다. 제약보다 자유를 택하길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과제를 툭툭 던져주고,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심지어 녹음까지 하는 또 다른 동친, 한피디다. 나는 그에게 얍삽이라는 별명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지만. 기어코 그를 끌어들이는 게 나의 또 다른 목표이기도 하다. 자고로 고통은 함께 나눠야 빛이 나는 것 아니겠나.
각설하고,
첫 번째 과제를 끝내고 나니, 시작한 기분이 들긴 했다만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프로젝트'라고 거창하게 붙이긴 했다만 쓰레기 줄이기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지루한 고통을 '뜻'만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제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회의감만 들진 않을까. 지속적으로 재밌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주구장창 떠들어대는 주옥같은 대화를 간직할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우리는 콘텐츠를 만들기로 했다. 가끔은 잿밥에 정성을 들이기도 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의 한피디는 완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건만 동친과 나의 머릿속은 바빠졌다. 일단 시작하다니, 말도 안 돼. 보이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에 일단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이토록 아름답고도 볼썽사나운 경험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가. 팟캐스트도 유튜브도 좋지만 중요한 건 이름 아니겠나. 그렇게 우리의 관심은 프로젝트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귀에 콕 박히는 별명을 짓는 것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쓰레기는 사라지고 별명만 남았다. 결국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소리치던 한 피디도 두 손 두 발 들고, 우리에게 별명을 선사하기 이르렀다. 그렇게 얻은 내 별명은 무파마. ‘무덤 파는 마이 핸드’의 줄임말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물론이거니와 굳이 쓰레기가 되고 마는 물건을 기어코 사고야 마는 소비 충동에 걸맞은 별명이다. 너무 좋다며 부러워하는 동친에게 선사된 별명은 ‘매립지’ 남들이 안 쓰고, 버리는 물건을 굳이 받아와서 쓰는 특징을 살린 별명으로 역시 딱이다. 여전히 나는 한피디의 별명은 얍삽이라고 우기고 있다만 어쩐지 동의를 안 해준다. 그렇게 우리의 공식적인 첫 회의는 쓰레기에서 시작해 별명으로 끝났다.
물론 별명으로만 끝난 건 아니다.
다음 주는 어김없이 돌아올 테고, 무언가를 계속해야만 콘텐츠가 완성될 테니.
우리는 본격적으로 쓰레기를 줄여나가기 전에 평소처럼 일주일을 살아보기로 했다. 소유 목록을 정리한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쓰레기에 둘러싸야 있는지 알게 된 것처럼, 의식을 해야만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버리진 못할지도 모른다. 굳이 사진을 찍어 가며 남긴다는 자체로 방어벽이 세워져 있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생성하는 줄 알아야만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도 알게 될 터였다. 일주일이라도 편하게 살아보자는 의도는 아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제로 웨이스트가 두렵다. 채식을 하면서도 힘들다며 투덜거렸지만 제로 웨이스트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힘을 줘서 그럴 수도 있고, 아직 제대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채식처럼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고, 채식보다 황당한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지금과는 다른 풍경을 접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다행히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판 무덤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 느닷없는 안락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 기대치 않았던 밧줄이 등장하기도 한다는 것을. 더욱이 이번엔 함께 누워준 동료도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는 건 내가 더 이상 '무파마'가 아니고, 동친이 더 이상 '매립지'가 아닌, '제로 웨이스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될 그 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