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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25. 2020

이토록 찬란한 거장의 세계, 엘런 플레처 회고전

화려함과 담백함 모두가 공존하는 그의 작품 세계

작년 19년 11월부터 KT&G 상상마당 홍대 갤러리에서는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계의 거장 앨런 플레처의 회고전을 일곱 번째 20세기 거장 시리즈로써 <웰컴 투 마이 스튜디오!>의 테마로 주최했다.



전시는 앨런 플레처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삼아 시간 순서대로 작품들을 배치해 놓았다. 전시는 특이하게도, 5층에서 시작되어 4층으로 내려가는 식의 관람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시 순서는 뉴욕에서 런던으로, 플레처/포브스/질, 크로스비/플레처/포브스, 그리고 마지막 활동 지점이자 현재 오늘날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인 디자인 전문 컨설팅 회사로 알려진 ‘펜타그램’으로 마무리된다. 전시의 테마가 ‘웰컴 투 마이 스튜디오!’라 그런지 그에 걸맞게, 아무래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작품을 보고 여행을 하듯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한 작품 안에서 간결하면서도 강렬함을 동시에 지니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이 앨런 플레처의 작품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다.

사실 최근 국내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바우하우스의 유행 아닌 유행이 불고 있다. 덕분에 가구, 건축, 강렬한 원색, 비례, 대칭, 모던디자인과 관련하여 관심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그러한 환경 때문일까, 나 또한 근 현대 디자인부터 그래픽 디자인까지 관심의 폭이 더 넓어지게 되었고 또 다른 거장의 전시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영국 천재 화가 호크니에 대한 열풍이 국내에서 불었을 때, 나 또한 그로 인한 영향이었는지 영국의 예술계 거장들에 대한 공부도 그때부터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때 앨런 플레처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좋은 기회로 KT&G 상상마당 홍대 갤러리의 앨런 플레처 회고전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거장의 발자취는 역시나 화려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담백했으며 강렬한 여운이 존재했다. 모든 작품이 입을 모아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담백하다는 느낌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중 그러한 느낌이 가장 짙게 느껴지는 몇 가지 작품들이 있었다.

바로 [크로스비, 플레처, 포브스]와 함께 할 당시의 시기였다. 그때 디자인한 그들의 명함, 그리고 당시 제작한 디자인 달력들이었는데 그 작품들은 뒤에서 다시 사진과 함께 언급하겠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전시를 보고 난 후 머릿속에 느껴지는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지만 이러했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가 다 강렬한 무언가로 시선을 사로잡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간결하다. 한눈에 들어오는 강렬한 색감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작품 속 비례와 균형감, 그러나 최소한의 사용과 배치가 느껴지는, 무엇보다도 간결한 전체적인 분위기.

그 자체로써 그가 거장임을 알리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디자인들은 특정 산업 분야에 정해져 있지 않았고 굉장히 다양하며 폭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그의 활동 영역은 무언가로 규정되거나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각종 잡지, 전시의 포스터, (그저 평범한 달력이 아닌 다양하고도 참신한 테마로 전개되는) 달력, 브랜드 로고, 초대장, 알림판, 명함 등등 그 외에 앨런 플레처 그의 개인적인 작품 활동까지.





산업과 예술 사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그의 작품들이 당당히 답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디자이너라면 한 번쯤은 꼭 와서 봐야 할 전시라고도 느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담백하면서도 신선하고 강렬한 아이디어가 실제 산업 제품들에 (디자인으로써) 어떻게 적용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좋은 기회이다. 사실 디자인이라는 게 참 어렵지 않은가. 참신해야 하는데 실용적인 측면도 보여줘야 하며, 그 와중에 색감, 균형감과 같은 미적 영역에서도 충분한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야 하니까. 그럴 때마다 이와 같은 거장의 전시가 좋은 레퍼런스이자 좋은 자극, 원동력의 일부분이 되어줄 테니 꼭 한번 방문하길 추천한다.



앨런 플레처 그의 첫 번째 발자취의 테마는 [뉴욕에서 런던으로]였다. 50년대 초 암울했던 영국의 시기를 뒤로하고 에너지 넘치는 미국에서의 교류학생 활동 등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고 60년대 즈음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당시 그의 포트폴리오가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였는데, 1차원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에 와서는 당연한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포트폴리오였다는 점에서 발길을 멈추고 주목하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일화가 기억났다. 달걀을 세우라 할 때는 아무도 시도하지 못하다가 달걀을 찌그러트려 세운 것을 보고 누군가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외친 일화 말이다. 보기엔 쉬워 보이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존재들이 사실 알고 보면 누군가의 획기적인 시도에서 출발한 것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시도와 함께 탄생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일종의 알림 같은 전시의 시작이 좋았다.


약 60여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트렌디한 그의 첫 번째 시기 속 작품들을 뒤로하고 마주한 다음 테마 [플레처/포브스/질] 코너는 그의 행보 다운 시작이었다. 1962년 4월 1일 만우절 날 시작한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테마로 작품들이 펼쳐졌다.




안정감 있는 타이어를 광고하는 타이포그래피 형식의 디자인은 지금 봐도 참 혁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감이라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코너링을 하는 듯한 타이포그래피의 역동적인 형태는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나아가 다음은 말문을 막히게 만든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왔던 테마다. 바로 앞서 언급했던 [크로스비, 플레처, 포브스] 코너다. 이들은 일종의 그래픽 디자인 업계의 지평을 함께 넓혀갔는데 작품들만 보아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을 넓혔다는 것은 곧 다양하고도 참신한 작품들이 많았다는 말이고 정말 그러했다. 전시 감상을 끝마치고 나올 때 머리에 잔상이 가장 오래 남는 코너이기도 했다.



다른 작품들도 좋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이 특별히 더 좋았던, 짙은 기억으로 남았던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신선함과 간결함과 화려함, 그 세가지가 각자의 분야에서 두드러지되 가장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었다.


크로스비, 플레처, 포브스 그들의 명함


단적인 예로 ‘크로스비, 플레처, 포브스’ 이들의 명함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이 깔끔하다 담백하다는 인상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얼굴 혹은 뒷모습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자신들의 얼굴과 자세를 명함의 전체에 담아내되 색은 흑백으로 표현하여 깔끔하게 디자인했다. 그리고 하단에 적어둔 자신들의 이름을 통해 명함임을 드러낸다. 저런 명함이라면 두고두고 생각나지 않을까? 그리고 저렇게 참신한 명함이라면 잊지 않고 연락할 만하다고 느꼈다.

눈에 띄는 타이포를 중심으로 한 달력 디자인



별자리와 특정 기념일을 테마로 디자인한 달력들



그다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들은 바로 특별한 테마를 주제로 한 달력들이었다. 색감이 강렬하고 그 외 다른 것들은 최대한 간결하게 했던 형광색의 그래픽 디자인 달력들, 그리고 별자리나 기념일들을 테마로 한 스페셜 달력들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그 자리에서 가장 오래 감상했던 것 같다.

이쯤 되니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의 원천은 무엇이었을지 정말 궁금해졌다.


해결은 문제를 보는 시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궁금함을 해소해주기라도 하듯, 전시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작은 화면 속에서 엘런 플레처 그의 다큐멘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의 마지막 코너에는 헤드폰이 마련되어 있었다. 헤드폰을 끼고 조용히 감상하다 보면 그의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영상 속에서는 앨런 플레처 특유의 시크한 유머도 느껴지니 전시의 막바지에 꼭 잊지 말고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글로써 그의 전시에 대한 감상을 전달하려니 한계가 느껴져 벅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활자로 여운이 느껴졌던 감상을 가두는 느낌이 들어 답답하기도 했다. 꼭 한번 눈으로 감상하고 그 묘하고도 경이감이 느껴지는 기분을 느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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