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6.
드디어 훈련소 입소한 날로부터 두 자릿수의 날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이보다 기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기상시각도 평소보다 한 시간 늦춰진 일곱 시였다. 여섯 시에 자동적으로 눈이 떠져 에잇 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일곱 시가 되어 다시 익숙한 기상나팔이 울리고, 오늘은 아침점호를 야외에서 실시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눈을 비비면서 밖에 나갔더니 해가 막 뜨고 있어서 그런지 공기가 차가웠다. 오늘은 처음으로 3교육대 전체(9,10,11,12중대)가 연병장에 정렬하여 아침점호를 실시했다. 먼저 각 소대별 인원 파악 이후 소대장훈련병-중대장훈련병-당직사관 순으로 인원보고를 하게 되는데, 우리 10중대와 9중대는 결원이 없었지만 11, 12중대에서는 격리된 인원이 몇 명 있었다. 그쪽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나 보다.
아침점호 순서는 먼저 인원 및 환자 파악, 특이사항 확인 이후 전체 뒤로 돌아서 전방에 함성 3초간 발사, 구령 조정 3회(전체가 열중 쉬어-부대 차려-뒤로 돌아 를 외친다), 다시 뒤로 돌아서 애국가 제창, 복무신조와 병영생활행동강령 제창, 감사의 인사 낭독(훈련병 중 한 명이 미리 작성된 것을 읽는다), 국군도수체조, 뜀걸음(구보) 이후 다시 모여서 마무리(일과 설명 및 전달사항)로 진행된다. 다른 것들은 이전에도 실내에서 실시해서 익숙했는데, 국군도수체조는 전에 살짝 배우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하려니 동작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나를 포함한 모두들 버벅거렸다. 그래도 체조를 하고 나니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침점호 때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뜀걸음이었는데, 아직 발과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수체조 이후에 뜀걸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데, 기적이 찾아왔다. 배식 분대와 분리수거 분대는 열외 하여 업무를 하러 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우리 분대원들은 추첨을 잘 뽑아 우리를 구원해 준 우리 분대장 훈련병에게 고마움의 윙크을 날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수료 때까지 뜀걸음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분리수거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생활관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분류하여 생활관 밖 쓰레기장에 모아 놓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인 쓰레기를 입영심사대 전체 폐기물을 모으는 큰 쓰레기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큰 쓰레기장은 아침에만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아침 점호 때는 항상 두 번째 일을 했다. 일주일 넘게 쌓인 쓰레기들이 많아서 오전에 두 번 왔다 갔다 한 후, 나머지 쓰레기는 내일 치우기로 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엔 핫도그가 나왔는데...... 역시 사회와 단절된 맛이었다.
생활관 벽에는 수료식 날까지 예정된 일정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데, 오늘의 오전 일정은 클린데이였다. 흔히 말하는 대청소 시간인데, 9시부터 분대별로 자신의 생활관과 더불어 맡은 구역 청소를 진행했다. 우리 분대는 그 역할이 아침과 같은 분리수거였고, 생활관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잘 정리해서 다시 모아놓았다. 그동안 훈련소에서는 제한된 물품으로 생활하다 보니 쓰레기가 나올 것이 많지 않았는데, 어제 부식을 받고 나서부터 부식 쓰레기가 확 늘었다. 과자 껍데기, 과자 박스, 페트병 등등. 그리고 그동안 격리 중에는 복도 정수기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어서 식수로 500ml 페트병을 지급했는데, 쓰레기통에 친절히 라벨을 떼고 구겨서 버립시다라고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버리거나 심지어는 물이 들어있는 채로 버려져 있는 것들도 있어서 그것들을 정리하는 우리들에게 감정의 격동을 일으켜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내뱉게 만들었다.
일이 많아 보였지만, 좁은 생활관에 수많은 장정이 있으니 인력의 힘으로 거뜬히 모든 구역의 청소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이제 좀 앉아서 쉬려고 하니, 침구 중 매트리스와 모포를 일광건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거창해 보이지만, 매트리스와 모포를 밖으로 가져가서 햇볕이 잘 들 것 같은 곳에 매트리스는 긴 쪽을 삼등분하여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 삼각대를 만들어 옆으로 세운 이후 위에다가 모포를 바닥에 닿지 않게 쌓는 일이었다. 바깥에 공간이 마땅치 않아 연병장 바닥 한구석에 모아서 진열해 두었는데, 밖에서 흙먼지만 더 묻혀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구시렁거리며 생활관에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이번엔 오전 안으로 PX를 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갑자기 생활관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다들 뭘 살 거냐고 서로 묻고 떠드는 것이 마치 어디 수학여행 나온 고등학생들 같았다. PX로 향해 걸어가는 제식걸음조차 평소의 축 늘어진 걸음보다 경쾌하고 빨랐다. PX는 입영 전에 들려서 제로콜라를 샀던 그 입영심사대마트였는데, 확실히 시중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우리 분대가 늦게 간 편이라 펩시제로라임은 품절이었고, 나는 일단 제로코크와 페트병커피 6개들이 세트를 하나씩 사고 과자 몇 개를 더 샀다. 입소한 이후 PX를 가게 되면 먹을걸 잔뜩 사야지 했는데, 막상 가보니 딱히 당장 먹고 싶은 것이 없어서 음료수를 더 많이 샀다. 격리 해제 이후 복도에 있는 쇼케이스형 냉장고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거기에 음료수를 쌓아놓으니 마음의 안정이 생겼다. 나중에 다른 분대 훈련병에게 듣기로는 그 이후에 제로콜라도 다 품절되어서 그냥 콜라들만 남았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도 제로를 좋아하는구나.
기억나지 않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는 개인정비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휴식시간이라 다들 px에서 사 온 것을 먹고 마시고 드러눕고 손빨래도 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4번 친구가 하고 있던 반깁스 가장자리가 날카로웠는지 종아리 옆쪽에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상처가 나 있어서 가지고 있던 연고를 발라주고 메디폼을 붙여줬다. 그리고 아무래도 어제 깁스를 풀고 훈련을 하니 발목 통증이 있어, 내가 가지고 있던 약을 주었다. 그걸 보고 다른 친구들도 각자 까진 상처, 근육통, 감기 증상 등을 내게 호소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맞은 처치와 내가 가지고 있던 상비약을 불출해 주었다. 우리 분대 훈련병들에겐 하루 전 미리 신청해서 20분 걸어가야 하는 의무실보다는 나한테 약과 처치를 받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다. 이게 바로 의무병의 역할이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먹으려고 챙겨 온 약이었는데 허허.
이후에 방송에 따라 다시 밖으로 나가서 일광건조를 시켜 놓았던 매트리스와 모포를 가지고 들어오기 전에 툭툭 털었는데, 털어도 먼지가 계속 나왔다. 옆구리가 터져서 솜이 환히 보이는 내 매트리스는 많이 삭아서 나보다 연배가 있어 보였다. 이런 분을 내가 깔고 눕는 것이 윤리적일까, 이제 그만 보내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렇게 해도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책을 보았다. 군대에는 진중문고라고 불리는 도서관 형식으로 책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현재 우리는 원래 우리 연대가 쓰던 건물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훈련소 조교나 간부님들 중 누군가가 거기에서 책을 가져와 여기에 배급하는 눈물 나는 과정을 거쳐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들어오는 책들은 다 검열을 거쳐 들어오는데, 옛날에는 이미 나와있는 책들에 검열마크를 찍고 들어왔겠지만 요즘에는 미리 도서 선정을 하여 책을 제작할 때 표지에 진중문고라는 작은 띠가 둘러진 형태로 발간된 책을 공급하는 것 같았다. 검열을 거친다고 하면 특정 프로파간다 위주의 책만 들어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방부가 거부감을 가질만한 주제가 들어있지 않은 책은 거의 다 허용이 되는 것 같았다.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 자기계발서, 인문학과 과학 서적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이 들어왔다. 모처럼 여유 있게 책을 읽을 시간이 주어지니 매우 재미있고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열흘 동안 머리를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오랜만에 뇌가 운동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그랬다.
다시 또 저녁을 먹고, 샤워하고, 쉬면서 분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어떤 친구가 바다거북수프라는 게임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처음 들어봤는데, 분대원들 중 다른 한 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은 한 명의 출제자가 있고, 어떤 이야기를 제시해 주면 다른 사람들은 스무고개 형식으로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 정답을 맞히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바다거북수프를 주문하고 먹은 다음 주방장에게 이게 진짜 바다거북수프냐고 질문한 이후, 맞다고 대답을 듣고 집에 가서 자살했다는 이야기에서 왜 자살했는지를 맞춰야 한다. 정답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온다.
이렇게 오랜만에 머리를 쓰는 놀이를 하고 있다가, 저녁 점호 전 21시경에 청소시간이 되어 다시 분리수거와 생활관 청소를 했다. 시작 시의 구호는 "청소하자!"였다. 분명 오늘 아침에 열심히 분리수거를 했었는데, 오늘 px를 다녀온 이후 다들 먹고 마신 쓰레기들이 왕창 쌓여 있었다. 우리 분대가 기여한 몫이 있으니, 마음의 평정을 지키며 분리수거를 진행했다. 친구들아, 제발 쓰레기통 라벨에 적힌 것 좀 잘 보고 버려주려무나.
저녁 점호 이후에 매트리스 어르신을 깔고 불을 끈 채로 누워있는데, 아까와 다른 분대원 한 명이 바다거북수프 게임을 하다가 필을 받았는지, 자기가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기 손빨래 후 마르라고 천장 옷걸이에 걸어둔 옷에 영혼이 들어갔다 나온다는 둥, 육군훈련소에서 예전에 누가 어떻게 죽었다는 둥 괴담을 아주 실감 나게 이야기해 주는데, 나중에 유튜버를 해도 대성할 것 같았다. 수료 전날에 어떤 분대원이 말해줬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천장에 걸린 옷을 바라보고 잘 수가 없어서 옆으로 돌아누워 잤다고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재미있고 풍족하고 보람찬(?) 하루였다. 자다가 깨서 새벽 1시에 불침번 선 것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