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7.
어느덧 11일차. 육군훈련소 보충역 훈련이 총 22일, 마지막 날에는 수료식만 하고 오전에 끝나는 일정임을 생각해 보면 이제 반이 넘어가는 때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세는 이유는 그만큼 기초군사훈련을 끝내고 다시 사회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마음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훈련병들도 같았는지, 어떤 친구는 일정이 적힌 종이에 하루 일과가 끝나면 매직펜으로 그날의 일정에 크게 엑스표를 치고는 했다. 그리고 남은 날의 일정에 D-11, D-10... 식으로 표시를 해 놓았는데, 의욕이 앞서서 날짜 계산을 잘못하여 수료식 전날에 D-0을 쓰고 수료식날에 D-Day라고 썼다. 어차피 수료식 날은 오전에 수료식만 마치고 나가는 일정이니, 이렇게 쓰는 것이 맞는 것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도 7시 기상하여 야외에서 아침점호를 실시했는데,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도수체조로 몸을 덥히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분리수거 쓰레기들을 열심히 옮기고 아침식사를 했는데 역시나 맛은 없었다.
일요일 오전 일과는 원래 종교활동/개인정비 시간이었는데, 타 중대에서 코로나환자가 발생한 관계로 오늘 종교행사는 취소되었다. 난 종교가 없지만 한 때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실로암 영상이 실제인지 궁금하여 다른 애들을 따라 기독교를 신청했었는데, 행사가 취소되어 심심함과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원래 종교행사를 가면 부식으로 주는 초코파이 1개와 사이다 1캔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어제 부식으로 몽쉘 6개들이 한 박스를 받고 px에서 음료수를 잔뜩 사 와서 큰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 어떤 분대장님이 알려주셨는데, 예전에는 종교별로 부식이 달라 그것으로 장병들을 모으려는 경쟁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서로 합의를 해서 다들 같은 부식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육군훈련소 홈페이지를 통해 나에게 써준 편지의 인쇄본을 받았다. 와이프와 친구들이 써 준 편지를 보고 새삼 내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여기서 나름 정신없이 굴러가며 살고 있어 심심한 게 덜한데, 와이프는 내가 있다 없으니까 더 심심할 것이라 생각되어 조금 안쓰러웠다. 내가 미리 부탁해 두어서 어떤 친구는 내게 뉴스 헤드라인을 쫙 복붙하여 보내주었다. 추가로 앞으로 며칠간의 날씨, 기온도 보내주었는데, 나중에 날이 추울 때 소소한 도움이 되었다. 어떤 분대원은 여자친구가 편지를 많이 써 주었는데, 답장한다고 매일 저녁마다 항상 편지지와 볼펜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우리 분대원들 중 편지 받은 개수로는 순위권 안에 들었다. 다들 고마워요 헤헤.
일요일에는 취사병들도 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점심도 맛이 없었다. px와 부식이 우리의 구원자였다. 다시 언제 px를 갈 수 있을지 모르니 px에서 사 온 것은 아껴먹고, 부식으로 나오는 것들은 보통 스케일이 크게 과자는 한 박스씩, 음료수는 500ml 페트병으로 줘서 열심히 먹었다. 물론 그만큼 분리수거 거리가 쌓이는 것은 덤이었다.
우리 분대는 중대에서 첫 번째 분대여서, 분대 생활관이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모이는 라운지와 그쪽 입구에서는 가장 멀고, 분대장님들이 쓰는 생활관과는 제일 가까웠으며, 물품이 들어오는 입구와 보급창고에서는 가장 가까웠다. 즉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분대장님들이 아주 쉽게 부를 수 있는 위치였고, 특히 훈련이 없을 때 일을 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노동력을 제공하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점심 식사 이후에 오늘 새로 받을 부식을 나르러 한번, 새로 보급받을 옷과 물품 상자를 나르러 또 한 번, 우리가 쓰진 않았는데 아마 다음에 올 현역들이 쓸 수양록 같은 책을 나르러 다시 한번. 무거운 책들은 인간 컨베이어벨트를 만들어 서로 전달해서 목적지에 쌓고. 생활관에 앉아있다가 몸을 좀 쓰니 얼마 먹지 않은 점심식사가 소화되어 배가 아주 편안해졌다.
원래 오후는 개인정비 시간이지만, 내일 훈련장에 가서 총기분해와 조립, 사격자세 평가가 있어 오후에는 총기분해와 조립 자율선행학습을 시행했다. 라운지에서 나눠준 총기분해도에 따라 k-2 소총을 분해하고 각 부품의 명칭을 외워야 했다. 명칭은 노리쇠뭉치, 복좌용수철 밀대뭉치 등 대부분 우리말이지만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어 생각보다 외우기 어려웠다. 다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분해하느라 버벅거렸는데, 분대원 중 한 명이 빛의 속도로 자기의 것을 분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도와줬다. 예전에 어디서 배웠다고 했는데, 훈련소를 이전에 한번 다녀오셨나...... 다행히 그 친구의 도움으로 다들 금세 총기 구조에 익숙해졌다.
분해해 보니 총기에 검은 탄매와 먼지가 잔뜩 있는 것이, 이거 쏠 수 있는 총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지급받은 부직포와 기름으로 열심히 부품을 닦다 보니 움직임도 조금 부드러워지고 때도 벗겨졌지만, 이미 녹슨 부분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모처럼 할 일이 없는 주말에 일이 주어지니 분대원들이 다들 열심히 했고, 나도 따라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정리하라는 방송이 나와서 다시 조립하고 총기보관함에 총을 보관하였다.
군대에서는 총기 관리가 매우 중요해서, 훈련병들은 총을 지급받으면 다시 총기 보관함에 총을 넣기 전까지는 항상 자기 총을 휴대하고 다녀야 해서, 이렇게 분해 조립을 위해 꺼내놓을 때에도 화장실 갈 때는 총을 꼭 메고 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총기보관함에 총기수납을 할 때에는 전원 수납이 완료될 때까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생활관에서 대기해야 한다. 민간에서도 총기가 금지되어 있어 그런지, 전체적으로 총기 관리가 빡센 편이다.
저녁밥은 아침과 점심보다는 맛이 나아서, 조금 더 많이 먹었다. 부식이 있더라도 과자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이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는 괜찮아졌다. 샤워시간 이후에 분대원들과 떠들고 놀았는데, 바다거북수프 게임도 하고, 분대원 중 스무 살 막내인 친구의 랩을 듣고 감탄하기도 했다. 우리 분대에 참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총기마스터, 인간재봉틀, 훌륭한 이야기꾼 등등...... 나는 음, 힐러?
일요일에도 청소는 해야지. 청소하자! 오늘은 하루종일 생활관 안에 있었으니, 역시 굉장히 많은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우리가 지구의 환경파괴에 기여하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하다가, 가끔 식비닐 같은 냄새가 나는 쓰레기봉투를 들 때에는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제는 분대원들과 많이 친해져서, 일하면서 동시에 떠들면서 노는 게 마치 어렸을 때 학교 청소시간 같았다. 아, 요즘 애들은 학교에서 청소를 안 시킨다던데. 그리고 헬스쟁이 녀석아, 아무리 아령이 고파도 그렇지 재활용쓰레기를 들었다 놨다 하면 어떡하니.
청소가 끝나고 저녁점호 이후 취침준비를 하는데, 주말이 끝나가는 게 아쉬웠다. 주말에는 그래도 좀 여유로웠는데, 내일부터는 힘든 일정이 예정되어 있어서 앞으로 5일 동안만 잘 넘기자고 생각했다. 입소 전 친구들에게 다치지 말고 나오는 게 최선이라고 들어서 무리하지 말고 내 몸은 내가 잘 챙겨야지 싶었다. 내일은 발을 꽁꽁 싸매고 가야지. 으음. 쿨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