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9.
오전 4시에 불침번을 서느라 깬 이후 5시에 잠들어, 다시 6시에 깨려니 정신이 몽롱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가 와서 실내점호를 하여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실내점호를 마치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잠깐, 비가 온다고?
비가 오면, 훈련병들은 생활관 바깥에 나갈 때 판초우의를 입어야 한다. 입소 전 친구가 X같은 판초우의라는 말을 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어제 군장에 넣어놓았던 판초우의를 꺼내 처음 펼쳐보는데, 마스크를 써도 맡을 수 있는 퀴퀴한 향이 올라오는 순간 납득이 되었다. 마치 세탁기를 돌린 이후 까먹고 세탁기에서 꺼내지 않은 옷을 나중에 꺼내서 말렸을 때 나는 냄새가 농축되고 숙성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이 우의를 한 번쯤 빨기는 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분대원들은 다들 투덜투덜 대며 판초우의를 입고 열심히 걸어가 밥을 먹고 다시 열심히 걸어오며 기도했다. 제발 비가 빨리 그치게 해 주세요.
신이 우리의 기도를 반쯤은 들어주셨는지, 출동을 나갈 때쯤에는 비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직 비가 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다시 판초우의를 입게 되었다. 전투복 위에 판초우의, 그 위에 다시 전투조끼와 방탄모, 총을 멘 다음 팔의 활동성을 위해 판초우의를 양쪽 옆부분을 돌돌 말아 전투복 어깨 위쪽으로 모아서 견장 부분에 고정시킨다. 이렇게 되면 판초우의가 목 부분과 앞치마, 뒷치마 부분밖에 남지 않아 방수효과가 있는지 과연 모를 지경이었다. 혹자는 피콜로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판초우의를 입으면 전투복과 판초우의가 다 젖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오늘은 실제 영점사격이 있는 날이어서 사격장까지 이동하였는데, 그 거리가 거의 화생방연습장과 비슷했다. 약 한 시간쯤 걸려서 이동하였는데, 다행히 비는 중간에 그쳤지만 역시나 발과 발목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민가를 지나던 도중 사격과 박격포 훈련 때문에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발견했는데, 새삼 얼마나 시끄러우면 그럴까, 내가 이어플러그는 잘 챙겨 왔나 주머니를 살짝 만져보았다. 다행히 이어플러그를 놓고 오진 않았다.
사격은 중대별로 따로 진행되었는데, 어제 나는 먼저 사격하는 조에 뽑혔고, 번호도 3번이라 당연하게도 제일 먼저 사격하는 조에 당첨되었다. 사격장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그지같은 판초우의도 벗고 다시 방탄모와 조끼를 입자마자 바로 집합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리고 정렬해서 첫 번째로 사격장 사로에 들어갔는데, 뭐가 뭔지 몰라서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어리바리한 채로 지시에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로 안에서 먼저 총으로 이상한 곳을 겨누지 않도록 사로에 고정시키고, 엎드린 자세에서 지시를 받아 실탄이 장전된 탄창을 총에 끼웠다. 엎드린 곳에는 고무매트가 있었는데, 비가 와서 아주 흥건히 젖어 있었다. 에잇 까라면 까야지 하고 엎드려서 물을 흡수했으니 아마 내 뒷사람들은 조금 덜 젖었을 것이다. 이어플러그를 끼니 마이크로 지시하는 중대장님의 목소리는 들렸는데, 옆에서 어리바리한 날 도와주는 분대장님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준비하는 와중에 옆 중대에서 먼저 사격을 시작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준비가 끝나고 어제 연습한 엎드려쏴 자세에서 25m 떨어져 보이는 표적을 향해 단발로 영점사격을 5회 실시했다. 긴장한 상태에서 처음 방아쇠를 당기니 쾅하는 총소리가 들렸고, 표적에 잘 맞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플러그 덕분에 소리에 깜짝 놀라지는 않았는데, 한 발을 쏠 때마다 반동으로 몸이 움직여 다시 가늠좌를 통해 조준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방탄모가 고정이 잘 안 되어 오른눈을 자꾸 가려서, 방탄모를 자주 끌어올려줘야 했다. 정신없이 5발을 쏘고 나서, 표적에 걸어가 표적지를 가져와서 탄착군이 형성된 것을 확인하고, 분대장님이 클리크(가늠좌) 조정을 해주신 이후 다시 5발을 쏘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숨을 잘 참고 한 발 한 발 쏘았다. 가쁜 숨을 내쉬고 다시 표적으로 가서 표적지를 가지고 오는데, 중대장님이 표적지를 건빵주머니에 넣으라고 말씀하셨다. 중대장님의 반복되는 명령에도 사격 1조의 아무도 건빵주머니가 어딘지 몰라서 허둥지둥하다가, 바지 옆주머니라고 알려주셔서 급하게 쑤셔 넣고 다시 돌아와서 퇴장했다. 건빵주머니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괜찮아요. 우린 보충역이니까.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서 건빵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격 결과는 다른 교관님이 따로 판정해 주셨는데, 표적을 맞추는 것 자체보다는 탄착군이 얼마나 가까이 잘 형성되었는지를 보았다.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잘 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합격 판정을 받고 행복했다. 우리 분대 친구들은 다 합격했고, 그중에 잘 쏜 친구는 특급을 받아서 퇴소할 때까지 우리 분대 스나이퍼라고 불렸다.
우리가 맨 첫 조여서 사격이 끝나자 10시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훈련병들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소대장님의 호출에 다 같이 달려갔더니 기쁜 소식을 들었다. 먼저 사격한 사람들은 먼저 복귀해서 점심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신이 내 기도를 다른 식으로 들어주셨나 보다.
복귀하는 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다들 사격을 열 발만 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까 지나갔던 현수막을 다시 마주쳤는데 뒤에서 들리는 사격소리를 듣고 있자니 소리의 크기가 상당했다. 식물에게도 청각기관이 있었으면 매일 들리는 이런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기 주민분들도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활관으로 복귀하는 일 밖에 없어서 그저 걸었다.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생활관이 보이고, 오늘은 이제 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생활관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점심 먹을 준비를 하라고 하셔서, 신발끈을 풀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분대 대표로 라운지로 갔던 친구가 불행한 소식을 들고 왔다. 사다리 타기에서 져서 우리 분대 인원들(먼저 쏜 8명)이 배식을 담당해야 한단다. 원래 배식하던 분대가 아직 사격을 하지 못해 사격장에 남아있어, 미리 온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배식을 해야 했는데, 그게 바로 경험이 없는 우리였다.
우리의 배식작전은 굶주리고 있는 훈련병 동지들을 위하여 분대장님 한 분의 지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져야 했으나, 분대장님이 배식 작업에 익숙하시지 않았고 우리는 까막눈에 가까워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나는 밥을 다 받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숟가락을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밥과 반찬을 떠 주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황을 살필 여유가 있었다. 분대장님께 오늘 총 점심 먹는 사람 수를 듣고, 지금까지 몇 명이나 밥을 받았나 체크하고, 숟가락과 식판이 부족하면 찾아다가 보충하는 등...... 평소에 안 쓰던 머리를 써서 일을 처리하려 뛰어다녔다. 배식 중간에 만두 반찬이 다 떨어질 것 같아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옆 중대에서 반찬이 남는다고 우리에게 주셔서 문제없이 배식을 마칠 수 있었다. 줄 선 사람들의 배식을 마치고, 더 이상 밥 받을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배식하던 우리 분대원들이 마지막으로 밥과 반찬을 퍼서 먹었다. 만두가 많이 남아있어서, 오랜만에 많이 받았다. 식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배식작전은 성공했으나, 보상으로는 새로운 물집을 받았다.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px를 갔다. 성치 않은 다리를 이끌고 px를 가서 뭘 살지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짭짤한 과자 위주로 샀다. 부식으로 나오는 과자들은 대부분 달달이들이어서, 밸런스를 맞추려면 역시 짠 걸 먹어야 했다. 프링글스 큰 통이 1500원밖에 하지 않아서 여러 개를 샀다. 그리고 혹시 맛없는 밥이 또 나올걸 대비하여 맛다시(볶음고추장 같은 것)를 샀는데, 결국 이건 퇴소할 때까지 먹지 않았다. 퇴소 후 홍형에게 맛다시를 주었더니 추억의 맛이라며 정말로 좋아했다.
남는 오후 시간에는 총기를 정리하고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늦게 사격했던 친구들도 돌아와서, px에서 사 온 프링글스를 나눠줬더니 매우 좋아했다. 저녁에는 사회의 맛이 나는 카레가 나와서, 냠냠냠 먹었다. 역시 카레는 실패하지 않는다.
이후 개인정비 시간에 서로 오늘 누가 잘 쐈느니 특급을 받았느니 막 떠들고 놀다가, 분대원 중 한 명의 사회에서의 직업이 싱어송라이터라는 것을 알아냈다. 역시 장난기가 많은 우리 분대원들은 "혹시 요즘 챠트를 휩쓸고 있는 가수가 누군지 알아? 하나, 둘, 셋, ㅇㅈㅎ!(단체로)" 식으로 구호를 만들었다. ㅇㅈㅎ 친구는 처음에는 쑥스러워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행사에서 추앙을 받는 교주처럼. 누군가가 이 친구에게 곡을 쓰는 영감을 어디서 얻냐고 물어보자 자신이 삶을 주로 소재로 한다고 답했는데, 훈련소생활도 혹시 노래로 만들 생각이 있냐고 재차 물어보니 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점호는 총기점호였는데, 역시 실제 사격을 하고 나니 총기 안에 탄매가 잔뜩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탄이 발사될 수 있을까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오늘 할 일을 다한 총기를 분해해서 열심히 닦아 주었다. 이쯤 하면 다 되었겠지 하고 잠시 손을 놓고 놀고 있는데, 분대장님이 들어와서 명언을 하나 날려주고 가셨다. "총기손질은 끝이 없다." 결국 자기 직전까지 열심히 총기를 닦았다.
내일은 다행히 멀리 나가서 하는 훈련은 없고, 못했던 체력측정을 한다고 들었다. 몸상태가 이러니 체력측정은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편안히 잠이 들었다. 오늘은 불침번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