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30.
춥다. 아침에 모포를 걷고 일어서자마자 한기가 느껴졌다. 어제 비가 온 탓일까. 생활관 바닥은 온돌이라 따뜻했는데, 윗공기가 차가웠다. 이렇게 추운데 아침점호라니.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귀마개도 하고 밖에 나갔는데, 대비를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찬바람에 바깥에 나와있는 살갗에는 있는 대로 소름이 돋았다. 도수체조로 몸을 덥히고 오늘도 역시 분리수거와 아침밥을 해치운 후 다시 생활관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따뜻할 수가. 오늘 훈련을 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전에는 정신전력 평가가 있었다. 평가라니 혹시 객관식시험이나 그런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평가 내용은 세 가지 주제 중 한 가지를 골라 열 줄 이상의 작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중 제일 첫 번째 주제인 '국가는 왜 소중하고, 국방력은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를 골랐는데, 다른 주제들보다 짧았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시간 30분 동안 열심히 펜을 놀리고 뇌를 괴롭혀서 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분대원들끼리 각자 자기가 쓴 글을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 글은 마치 연설문 같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 분대원들은 다들 자신만의 문체로 재밌고 멋있는 글들을 썼는데, 우리 중 최근에 공무원에 합격한 친구는 마치 입시논술 같은 느낌의 글을 낭독했다. 낭독회가 끝나고 각 분대별로 대표 한 명씩을 뽑아서 라운지로 글을 제출해야 해서, 우리 분대에서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써넣은 친구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이때가 포르투갈전으로부터 이틀 전이었으니, 마치 예언과도 같은 글이었다.
등을 떠밀려서 쓴 글을 가지고 라운지로 간 친구는 안타깝게도 마이크에 대고 한번 더 낭독할 기회까지는 얻지 못했다. 소대장님의 낭독자 선정 기준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글에 잘 녹여낸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휴머니즘이라니, 중꺾마를 이기고 어떤 사람이 선정되었을까.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자기 자신을 대한민국과 미국 이중국적자라고 소개했다. 그럼 대체 왜 보충역으로 왔을까? 답은 발표문 안에 있었다. 발표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인이셨다. 역시, 군대는 휴머니즘도 군대스럽구나. 훌륭한 발표에 우리 분대 모두 한 뜻으로 열렬한 박수를 쳤다. 칭찬과 위로의 의미를 담아.
점심시간 이후에는 체력측정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양치를 하던 중 의무실 신청한 인원은 준비하라는 방송이 나와 전투복으로 환복하고 라운지로 나갔다. 의무실은 입영심사대 안에 없고 원래 연대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예 걸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면 거기까지 걸어가야 했다. 가는 데만 20분이 넘게 걸렸는데, 그래도 군장이 없어서 걷는 것이 수월했다. 날씨도 풀리고 해가 떠서 광합성이 잘 되는 느낌이었다.
의무실에 간 우리 중대 인원만 열 명이었는데, 오늘은 군의관 두 분이 29연대를 다 진료를 보아야 하니, 12중대까지 생각하면 한 명당 60명을 진료를 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분들도 고생이 많겠구나. 내가 마지막 순번이었는데, 필요한 것은 나눠주느라 소진된 약들이었으므로, 나라도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직업을 밝히고 어떠어떠한 약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빠른 의사소통과 빠른 진료. 컴퓨터를 쳐다보는 군의관님의 얼굴이 나보다 지쳐 보였다. 진료를 받고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코로나검사를 받는 12중대 훈련병이 보였다. 검사하는 군의관님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또 나왔네 하는 투덜거림. 아 이래서 요즘 아침점호 때 11,12중대 사람들이 조금 줄어들었구나.
다시 20분을 걸어와서 생활관에 도착하니, 우리 빼고 다른 인원들은 이미 체력측정 항목 세 가지 중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를 다 마친 상태였고, 의무실을 다녀온 우리들은 연병장으로 가서 바로 이 두 가지를 측정했다. 오랜만에 안 쓰던 근육을 쓰려니 역시 쉽지 않았다. 윗몸일으키기는 그래도 할 만했는데, 팔굽혀펴기를 할 때는 지지해주는 철제 바에 손을 닿으니 너무 시려워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악으로 깡으로 해야지. 2분 동안 실시한 개수를 세었는데, 2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가 싶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질 않는구나. 일해라 내 몸아. 그래도 7급 기준은 둘 다 넘기긴 했구나.
마지막 세 번째 종목은 3km 달리기(뜀걸음)였는데, 입영심사대를 삥 둘러 한 바퀴 반을 도는 코스였다. 이걸 하기 전에 먼저 열외할 사람 신청을 받았는데, 나는 발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열외 신청을 했고, 우리 분대에서도 다리 부상을 입은 친구들, 목발 짚던 친구 등이 열외 신청을 했다. 소대장님도 부상 등으로 제한시간 안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으면 열외하라고, 몸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현역이라면 체력측정도 점수화되어 나중에 배치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우린 보충역이니까. 하지만 우리 분대에는 모든 종목 특급을 노리는 전직 축구선수와 예술체육요원이 있었는데, 그 사연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주일 전 오전에 열심히 다들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한 소대장님이 우리 분대에 들어오셔서 우리랑 잡담을 나누시다가, 원래 내일 체력측정이 예정되어 있는데, 화생방훈련이 길어지면 미뤄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체력측정에 어떤 항목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소대장님은 책자에 항목과 급수 책정 기준이 있다고 하셨다. 급수는 특급, 1급-7급 순으로 되어있었고, 한 종목이라도 7급 기준에 못 미치면 불합격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분대원이 혹시 전부 다 특급을 받으면 포상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소대장님은 껄껄 웃으시며 뭐든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줄 거라고 하셨다. 이게 바로 우리 분대 몇 명의 큰 모티베이션이 되었다. 여담으로, 책자에 쓰여있는 급수표 기준에 나이 기준도 있는데, 20-24세에 비해 25-29세는 기준이 조금 더 낮았다. 그걸 보고 소대장님께 혹시 30세 이상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여쭤봤는데 소대장님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셨다. 하긴 이렇게 늙은 훈련병이 몇 명이나 있겠어.
어쨌든 동기가 충만해진 두 명의 친구들은 체력측정이 미뤄지자 특급을 받기 위한 특수훈련을 시작했다. 훈련교관으로는 딱 마침 우리 분대에 있었던 헬스트레이너 친구가 있어서, 쉬는 시간이나 개인정비 시간에는 항상 숫자 세는 소리와 그 두 명이 운동하며 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뿐만 아니라 달리기를 잘 하기 위한 다리 근육 강화, 코어근육까지 온몸의 근육을 찢고 만드는 과정이었다. 오죽하면 트레이너 친구가 너네 두 명은 나갈 때 PT비 내고 가라고 할 정도로. 날씨가 추워 땀냄새가 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달리기를 열외한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달리기 코스 안내와 진행을 도왔다. 나는 결승선에서 누가 들어올 때 내 옆의 분대장님이 들어온 시각을 재면 순위표를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코스는 결승선 부근을 반바퀴째에 통과하여 한 바퀴 반이 되면 왼쪽으로 꺾어서 결승선으로 오는 형식이어서, 반바퀴째 달리는 친구들에게 화이팅이라고 외쳐주었다. 시작한 지 12분이 지나서, 선두 두 명이 결승선으로 들어왔다. 2등이 바로 전직 축구선수였던 친구였고, 1분쯤 뒤에 3등이 예술체육요원 친구였다.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주다가, 뒤이어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정신없이 표를 나눠줬다. 날이 추운데 손이 얼어서 겹겹이 붙은 종이가 왜 이리 안 떨어지는지. 정신없이 계속 나눠주다 보니, 어느새 7급 제한시간이 되었다.(19~20분) 아직 표는 130번대까지밖에 나눠주지 못했는데, 이걸 어떡하나 하고 옆의 분대장님에게 여쭤보았다. 이분이 어제 그 명언, "총기손질은 끝이없다"을 날려주신 분인데, 오늘은 "낙오자는 버려야 한다"라고 하셨다. 전시에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인원은 전체와 임무완수를 위해서 버리고 가야 할 수도 있다며...... 언뜻 들으면 매정하지만, 맞는 말이어서 분대장님과 함께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여기는 훈련소니까, 낙오자들은 분대장님 중에 예전에 마라톤 선수였던 분이 한 바퀴 돌면서 다 챙겨서 돌아왔다고 한다. 역시 아무나 분대장을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생활관에 와서 2등 한 친구의 기록을 보니 세 가지 종목 다 특급이어서, 우리는 그 친구를 특급보충역전사라고 떠받들어 줬다.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3등을 한 친구는 기록이 조금 늦어서, 아쉽게 1급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달리기 1등을 했던 훈련병은 나중에 알고 보니 현역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나는 달리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합격이었지만 뛰지 않은 사람뿐만 아니라 낙오했던 친구들도 다 같이 불합격이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 분대에선 불합격이 대세야.
저녁식사 후 샤워로 추웠던 몸을 녹이고 누우니 바닥에서 온기가 올라와 좋았다. 내일은 각개전투라는데, 훈련 빼고 이대로 누워있고 싶다. 옆옆 중대는 코로나 때문에 격리된 사람이 그렇게 많다던데. 우리도 누구 한 명 나와서 격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일주일 남았네. 내일모레만 버티면 그래도 주말이다. 분대원들과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px에서 사 온 과자도 먹고, 오늘 받아온 약들도 나눠주고, 내일 군장도 싸면서 개인정비 시간을 보냈다. 남은 시간을 잘 보내야지.
저녁점호를 마치고 모포를 덮고 누웠더니 배랑 다리가 땡겨왔다. 평소에 운동을 좀 해야겠다. 오늘은 일단 좀 자고. 불침번이 없을 때 많이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