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쉽게 말했지만

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by 양율



한 겨울에 머물며 살다 보면 시린 손이 야속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자연스레 뜨거운 여름을 떠올려 보는 일이 잦습니다. 겨울에 세부로 발리로 코타키나발루로 떠나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산한 겨울에 시달린 이들은 여름을 맞이하는 기대로 설레며 하늘을 날아갈 것입니다.


며칠 전, 어깨까지 왔던 장발을 잘랐습니다. 디자이너 선생님이 걱정을 하더군요. 그렇게 짧게 괜찮겠습니까?


전 입술을 깨물며 장중하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의 준비는 집에서 마치고 왔어요. 머리가 길어지다 보니 문득 머리가 짧았던 내 모습에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하여 머리가 짧은 시절의 내 사진을 주욱 보다 그리운 마음이 들어 결국 충동처럼 가위에 몸을 맡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공사를 완료하고 미용실의 거울을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이거 나 맞나. 변한 내 모습을 쉽게 인정하기엔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 짧게 해달라고 했나. 어색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겨울의 반대는 여름이겠고 장발의 반대는 짧아진 머리이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항상 반대되는 것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좇아 하리망당히 반대말들을 수집해 봅니다. 남자와 여자, 낮과 밤, 시골과 도시, 출근과 퇴근, 슬픔과 행복 따위들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최 반대되는 말을 모셔오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내 욕실 선반에 놓인 젖은 칫솔, 너와 영종도의 바다에서 저녁노을을 마주하며 건설해 낸 눈빛, 내가 혼자 흘렸던 눈물과 그때 입술에 닿았던 술잔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에는 반대말이 없습니다.


숨차게 머릿속을 쫓아다녀 보았지만 이런 것들에 반대말을 억지로 붙이려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훼예포폄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공자님이 사람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라는 취지로 춘추 책에서 전래되는 말입니다. 조선 시대에서는 포폄이라는 것은 주로 백성을 대하는 관리나 양반을 평가하는 일종의 인사고과제도로 그러한 서로에 대한 평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주자학의 시대는 반대말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양반과 상놈, 귀한 것과 천한 것, 군자와 소인들로만 모든 것이 나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남을 반대말로만 평가하는 일은 어렵고 복잡해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상의 훼예포폄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쓰기도 했었습니다.


누구는 어둠이요, 누구는 겨울이라며 쉽사리 남을 판단하는 일은 현대 어법에선 어긋난 문장인지도 모릅니다.


난 언제나 겨울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겨울이지 않는 한, 우리가 영원히 뜨거운 여름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의 젖은 칫솔과 가까울 것입니다. 생생한 바다 바람의 촉감과 당신만 몰래 보았던 내 눈빛, 혼자 흘렸던 눈물과 가깝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긴 머리든 짧은 머리든, 그것은 단지 내 머리카락일 뿐입니다. 내가 겨울에 코트를 입고 여름에 짧은 티를 입어도 그것은 변함없이 나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여전히 나일 텝니다.


당신을 쉽게 재단하는 사람들에게 지지 말아 주시길 기원합니다. 반대말이 없는 우리는 구석구석 이해받고 낱낱이 사랑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복잡한 당신을 미워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떠나시지 말아 주시기 부탁합니다. 당신이란 사람은 내 앞에 실존하는 한아름의 위대함이어서 당신을 잃어버렸을 때 내가 당신을 찾기 위해 수 없는 계절들을 헤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