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제께는 오늘을 몰랐고 오늘은 내일을 반드시 모를 겁니다.
연말엔 항상 내년에 목표를 떠올립니다. 매년 이맘 땐 귤 같은 것을 까먹으며 골똘히 내년의 나를 기획해봅니다. 대체로 이러한 생각은 몽상에 가까운 것들이 많습니다. 게으른 탓일까요. 현실이 박정한 탓일까요.
목표를 몇 가지 이뤄낸 해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주로 돈을 주고 쉽사리 살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해였습니다. 홍콩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거나,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거나, 마음에 둔 신발을 샀다거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새 친구를 사귄다거나, 한 주도 쉬지 않고 운동을 한다거나, 책을 낸다거나 하는 목표는 해를 넘기거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건강이 안좋을 때는 몇 주 운동을 쉬어버렸습니다.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책은 후년으로 미뤄졌었고요.
내년은 국적이 다릅니다. 내년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년의 관할이거든요.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다래다래 일어납니다. 학년이 달라지고, 연차도 달라지며 직장도, 사는 곳도, 관계도 바뀌기 일쑤입니다. 우주의 공간이 바뀌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말을 혈관을 뜨겁게 데우며 보내는 지도 모릅니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난 당신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것뿐일까요, 난 노래를 잘하는 법도 모르구요. 콜롬비아 요리를 할 줄 모릅니다. 태국어도 할 줄 모르고요. 외계인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건 아마 새해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는 것을 자랑하지만 모르는 것을 자랑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난 내 무지를 아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모르는 것들을 흠뻑 늘어놓고 싶기도 합니다.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바다만치 많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불안이기도 하고 공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안심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모르면 그걸로 위안이 됩니다.
현재의 국적에서 우리는 각자가 직장인이며 변호사며 건축가며 사업가겠지만 다 같이 밀려가는 새해, 새로운 시간의 국적에선 나도 바보, 너도 바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왕 그런 김에 바보들끼리 잘살면 될 것입니다.
한 번씩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진하게 감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몰칵몰칵 가슴이 흔들립니다. 난 너에 대해 얼마나 모를까, 너의 마음은 몇 킬로미터일까. 난 그곳까지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넌 왜 나에게 소리쳤을까, 넌 왜 날 사랑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걸로 다 일까.
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를지도 모릅니다. 당신에 대한 답안지는 비어있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형국입니다. 그것으로 되었을까요. 무모하게 흔들리는 당신을 작은 종이에 담아내면 당신에 대해 저명한 박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한들, 내일의 당신에 대해선 난 다시 백지를 제출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미래를 계획을 하는 업무는 어쩌면 희망을 임신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므로 사랑을 결심해보는 일입니다.
오늘은 조금 슬펐고요. 어쩌면 내일은 조금 더 슬플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난 내일을 차곡차곡 모을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을 사랑해보려니 살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