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신도림역에서 두릅을 파는 할머니를 보았다. 키 큰 사람들 사이로 노인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두릅이 담긴 바구니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급하게 자리를 옮겼는데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픈 허리로 쟁이로 나무를 다듬어 내며 생활비를 벌충할 생각 하고선 이곳까지 신역하며 나와 앉아있는 노정을 생각하면 가여움에 마음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무례한 연민에 괴로워하다 곧 모순된 내 마음을 깨닫고는 눈을 떴다. 그가 마음이 쓰였으면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두릅 몇 단이라도 사 오면 될 것이었다. 실용성 없는 무용한 감정에 난 또 한 번 자조했다.
나는 쓸모없이 마음을 괴롭히는 일에 강하다.
마음이 동해도 쉽사리 다가가지 않고 군자연하며, 거절하는 것도 단 칼에 하지 못해 눈치껏 알아줬으면 괜히 맘이 쓰이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삶이 스산하고 단촐하다. 내 속이 흙이라면 난 열매 맺히지 않는 밍숭맹숭한 나무의 씨앗만을 심어온 셈이다. 좋다면 덤벙덤벙 뛰어들면 그만이요, 싫으면 잡는 바짓 가락 뿌리쳐내면 될 일이다. 하면 폭풍과 햇살이 오가며 내 속에 풍성한 과일이 맺히지 않을까.
그러나 둘러보면 사정은 나와 다른 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내 지인 중의 하나는 좋을 대로 발을 옮기는 대장부 같은 이인데 사람에 배신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 후에 조심하면 될 터인데 본래의 성정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사랑에 저돌적이고 뒤돌아서면 미워한다.
세상사는 계제가 야속하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모양이 답답하고, 잠들 때 방 안에 들썩이는 소음들에 위아래 좌우 식구들이 밉상이다. 백화점 문을 열어 놓고 뒷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사람이 야만 같고 내게 연락 없는 오래된 사람들에 서운하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많이 없다. 사람들이, 일들이, 마음이 도망가는 나비처럼 쉽게 잡히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 태어난 굴레인지도 모르겠다. 급한 마음을 가지면 남에게도 내게도 혹독한 가시가 된다. 그럴 바엔 만사에 집착을 조금 포기해 버려도 좋지 않을까 한다.
오래된 생각이다.
마음을 단정하게 편집해 보는 것이다. 할머니가 반드시 불운하다는 믿음,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한소끔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노할 일도 기쁠 일도 아닐 것이라 명상한다. 콩나물을 물에 오래 불려 다듬어 내듯 북받쳐 오르는 질풍노도의 낭만 꼭다라지를 담담히 쳐내어 보는 것이다. 급하게 서둘렀던 길을 둘러 노을도 보고 바다도 보며 천천히 바람 쐬는 일이다.
그럼 다시 사랑이 전철처럼 찾아올 것이고 그 사랑은 애초보다 담백할 일이다. 할머니는 다른 날에도 찾아 줄 것이고 봄 나비도 하늘하늘 날아올 것이다. 그때 두릅 한 단을 데려와 따뜻하게 쪄 당신에게 내어주면 좋을 것이다. 당신이 고마움 내어주어도 그러지 않아도 담담한 마음으로 다음 끼니 준비해 보는 일이다.
놓아둔다는 건 곧 진솔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