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만든 한 끼

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by 양율




일을 하는 낮에 하루에도 몇 번씩 서명이란 걸 합니다. 서명은 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내가 이 일에 관계가 있음을 알리는 업무입니다. 내가 나임을 알리기 위해, 계약을 하고, 내가 받으며 주는 일에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엄숙히 내 이름을 눌러 적는 일입니다.


종이 위에 적힌 검은색 이름은 때로 쑥스럽습니다. 그저 몇십 년 손놀림의 습관에 휘갈겨진 글자일 뿐인데 그것이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퍽 거창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주고받을 때는 서명할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당신이 당신임을 알려주는 것은 손목을 갈겨쓰는 일이 아니라 당신의 온기가 자우룩한 말투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다듬어 가는 것 같습니다. 쉬지 않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늑자늑 대화의 수맥을 짚어가며 담담히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내게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으면 항상 내게 굵게 주름진 미간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미간으로 먼저 날 안도시켜 주었습니다. 그 주름은 언제라도 날 안아주고 싶다는, 손을 잡아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머니는 그리고는, 하이고, 어쩌노, 근데 아들아. 괜찮다. 괜찮을 거다. 같이 한번 힘내 보자. 그러려고 가족이 있는 거 아니겠나, 하고 자주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한편 표정의 변화가 없고 다소 무뚝뚝한 편이셨습니다. 그 대신 묵직한 몇 마디의 말로 내게 충고를 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한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십 대 초반 사람들과 많이 사귀던 때 밖으로 여행하며, 술로 며칠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때 나는 눈부신 우정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젊음의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다 지쳐 쓰러져 있는 일요일이면, 제게, 기억을 너무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라고 되묻자, 애써 만들었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 도리어 힘들게 만들 수 있다지, 라고 답하시고는 방문을 닫았습니다.


난 그 말을 며칠을 곱씹어보곤 했습니다.


머지않아 과연 아버지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우정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고, 설렜던 사랑의 기억 또한 고통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심한 표정으로 내 삶을 자주 읽어내는 듯하셨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내가 세상을 원망하는 일이 많아지자, 기억이 잘못되면 그거 병들어. 기억은 자주 상한 대도. 자주 갈아줘야 해. 당신은 말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내 기억 창고의 시스템은 그 누구보다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아니라도 나는 말투로 자주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심리학을 전공한 한 친구가 있는데요. 그는 이야기를 나눌 때 내 눈빛을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난 그가 어떤 저명한 심리학 이론을 떠올리고 있을까 긴장하며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곧 그의 입에서 다정하고 정직한 어법이 술술 흘러나오면 난 그 대화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손으로 짚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내 주위엔 그 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투와 표정이 그 친구만의 서명이라면 서명이겠습니다.


다른 친구는 문학과 예술을 논할 때 내 의견을 듣고 있는 와중엔 닫혀라 참깨처럼 입술을 굳건히 닫고 앙 물고 있다 몇 번이나 생각을 돌려본 뒤에야 어깨를 내게 내밀고는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이미 내가 마쳐 다른 얘기를 하던 도중이라 조금 타이밍이 늦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 마도 귀여워 가끔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서 자주 스쳐 지나가거나 간혹 오래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그건 인연의 일입니다. 그 숱한 만남과 이별 간에 난 그들의 마음을 늘 해독하려 애썼습니다. 세월이 지난 난, 그들이 내게 남긴 건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내게 남겨준 건 그 순간의 표정이었으며 나만을 위해 정성껏 차려주는 목소리 한 끼였을 것입니다.


만남과 이별은 항상 우리의 예상을 반박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제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 내가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이면 밤이 유난히 깊습니다. 기억이 내게 고통이 되지 않게 도마 위에 올려 기억을 다듬고 손질해 보는 일로 밤이 바쁩니다.


꼭다리를 정리하고 내장을 긁어 내 얇게 썰어 정리한 기억은 다만 간결한 모양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내게 말하는 표정과 말투임에 틀림없습니다.


난 이제 당신을 볼 수 없겠습니다만 당신이 내뱉었던 목소리의 모양과 떨림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당신의 모든 마음을 기억하자니 후에 내 모습이 처량해 두렵고요. 절절한 아픔이 무서워 당신과의 기억을 놓아줍니다.


이별한 사람뿐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고 계속 마음이 오고 가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그 따스한 말투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선물을 받은 마음에 새삼스레 눈물이 나곤 합니다.


요새는 지문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공항에서는 정맥으로 내가 나임을 소리치지 않아도 나를 조용히 알아봐 비행기를 타게 해 줍니다. 요새 만사가 그렇습니다. 홍채로, 얼굴 모양으로 날 알아보는 일이 흔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난 서명으로 당신을 확인하는 일이 싫습니다. 당신이 내게 지문을 보이는 일도 별로 내키지 않고요, 정맥으로 눈동자의 모양으로 당신을 알아보기는 요원할 것입니다.


다만 어느 날 어떤 카페에서 길거리서든, 당신의 말투가 흘러 귀에 들린다면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당신을 찾아다니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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