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대여증후군

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by 양율




나이가 들어갈수록 웃음이 가난해집니다.


스물의 그때를 돌이켜 보면 웃음이 헤펐습니다. 내 가슴속 햇볕을 대여해주다 보니 내가 쓸 온기가 없어 허전한 마음을 한 참을 들여다본 적이 꽤 많았습니다.

내가 잘 웃으며 살았다 꽤 행복했다고 일러주는 자료는 눈가에 남아 있습니다. 자욱한 주름 몇 가지는 내 봄꽃 빛깔 과거를 낱낱이 알립니다. 그 주름의 사이사이에는 내 예전의 웃음을 알려주는 부끄러운 맨 몸의 한 아이가 몸을 구부리며 삽니다.


젊다는 건 얼마나 상쾌한 일일까요. 오늘 낙담해도 든든한 내일이 오대양 바다처럼 수평선 가득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항해는 은빛 해말이 튀어 오르는 가슴 뛰는 각오겠습니다.


나이가 꽤 들었습니다. 산과 들을 쏘다니는 법이 신이 나지 않고 애틋합니다. 맑은 햇볕을 쬐노라면 감동 보단 내 그리움까지 친절히 배달해 주는 일이 흔합니다.


요샌 매일 이렇게 나이 들까 레몬 빛 햇볕을 피해 선크림을 발라봅니다. 가끔 화장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내가 여자라면 가득 나를 지워 내 허튼 과거를 숨기고 봄을 모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화장하며 날 지켜낼 수 있다면 차라로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웃음 빌려 주어 하얗게 비어있는 마음을 읽어보자니 빈 체육관에 농구공 소리가 탕탕 울립니다. 소년의 푸른 땀은 추억의 구름으로 불출되어 비 오듯 내 어깰 두드리고 난 가끔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도 합니다. 그럼 결국 내 청춘은 아직 내 속에 심장 뛰며 살고 있다 알게 됩니다.


젊다는 건 내겐 금색 땀의 드럼 소리입니다. 별들 앞에 서서 추는 민소매 붉게 익은 피부의 댄스입니다. 내일 어찌 됐건 오늘 완성되는 뜨끈한 빵입니다. 마이너스가 상계되는 알파의 바다요 과소평가된 소란이며 겨울을 압도시키는 왕성한 생명의 흙 뿌리입니다.


나도 그리 봄을 모사하여 살고 싶습니다. 입술에 무르익은 딸기 열매의 싱그러움을 발음하면서요.


하지만 나이가 드니 맑은 봄 대신 얼굴의 주름이 날 장식합니다. 주름 안엔 내 숨겨진 활력과 생명력이 채찍질받아 잠들어 있습니다. 그곳은 내 소년이 사는 곳입니다. 당신의 주름에도 세상에 지쳐 몰래 스며 잠든 소녀가 있겠고요.


햇빛을 빌려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에 빛깔이 소진되어 가나 봅니다. 내 몸의 소년은 피로를 피해 초록 속으로, 백만 개 별이 낙하하는 꿈 속으로 달아나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의 아동을 주름에 몰래 숨겨 사는 일일 텝니다.


날 오래 안 당신은 내 피로와 허탈함 속 어린 파도를 알아주고요. 나는 당신의 눈 덮여 자고 있는 하얀 소녀를 압니다. 서로의 주름 속 아직 철 안 든 소년 소녀를 알아봐 주는 것으로 좋겠습니다.


햇볕을 자꾸 빌려주다 보니 나이가 들었습니다. 혹여 빌려줄 아주 조금의 햇볕이 생긴다면 당신에게 대여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주름 안에 사는 그 청춘을 쬐어 몇 번이라도 잘 꿈꿔왔다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백하자면 그 햇볕은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그윽한 주름 안에 숨어 살다 오늘은 마음껏 가출할지도 모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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