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요새 멍하니 귤을 까먹는 일이 잦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날 마트에 내려가 또 한가득 귤을 거둬 왔습니다. 집에 오니 패딩엔 차가운 눈이 하얗게 배였습니다. 한 아름 안고 온 귤껍질에도 그렇겠고요. 허파서 아직 못 뱉어낸 작은 입김도 데려왔습니다. 난 겨울을 가지고 온 지도 모릅니다.
헤드폰을 끼고 한 노래만 몇 번이나 반복해 듣습니다. 오랜 습관이 있다면 그건 한 곡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 들어보는 일입니다. 이러다 이 노래가 싫어지면 어쩌나 무서운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면 노래의 가사를 귤을 샀던 영수증 귀퉁이에다 써 봅니다. 회계사라면 숫자를 번역가라면 외국어를 쓰겠습니다. 난 노래를 써봅니다. 좋아하는 노래의 단어를 꾹꾹 눌러써보는 일은 내 하찮은 걱정을 정답게 청소합니다.
어떤 노래든 좋을 것입니다. 언어는 무료니까요. 생각에도 계산서가 청구되는 세계입니다.
그 점에 고맙습니다.
노래를 뼈에 담는 동안 새콤한 노란색이 입에 계속 머뭅니다. 귤을 아귀아귀 씹은 이후엔 입맛이 돕니다. 오래 끓인 떡국도 좋고 푹 고아낸 맑은 오징어뭇국도 좋을 것입니다.
마늘을 구어 기름을 낸 뒤 냄비에 재료를 넣어 한참을 끓여내기로 합니다.
그 도중에 군고구마도 한 입 먹어봅니다. 껍질을 함께 먹으면 시커먼 겨울 맛이 납니다.
예전에 겨울밤이 되면 할머니집 불이 타오르는 아궁이에서 새벽이 되도록 장작과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것을 던져 넣고 익은 녀석들을 하나씩 까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때 할머니는 그러는 제게 <밤에 오줌 싼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밤에 잠 못 잔다> 였으려나요. 제가 장성하여서도 같은 말을 하셨던 것 보면 <잠 못 잔다>가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 밤은 무척이나 길었고요.
왜 불을 바라보는 일이 <잠을 못 자는> 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요. 불꽃 안에는 어떤 신비함이 있었을까요. 그리움에 사무쳐 잠에 못 드는 것일까요, 머릿속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가 하나 펼쳐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 마법의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생각하면 몽땅 미스터리한 하나의 소설 같습니다. 할머니가 끝내지 못한 옛날이야기 같은 것 말입니다.
느닷없이 보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도 써 봅니다. 후회도 써보고요, 아쉬움도 써보고, 그때의 좋았던 마음도 써냅니다. 기억 속에만 있는 그 사람 그림도 그려보고요. 눈은 이랬었나, 표정은 이랬지. 화낼 때 눈썹은 이랬더라. 그림자를 신경 써 명암을 그려내 볼 것입니다. 조금은 내키는 대로 꾸며내 봐도 좋을 것입니다. 결코 보내지지 않을 편지입니다.
밤이 새도록 같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얼큰한 국도 삼켜냈고요. 기억 속에 죽어있던 당신도 생각해 냈습니다. 아무 약속 없는 날. 그런 밤이 앙글방글 내게 선사해 주는 일들입니다.
이젠 오래오래 홍차를 끓여볼까 합니다. 끓는 물엔 소리가 납니다. 밖엔 음소거의 흰 눈이 내리니까요.
궁금합니다. 당신은 겨울이 어떤가요. 전 조용히 앉아 귤을 까먹는 일이 잦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