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4장. 따뜻한 차를 내올게 누가 그랬지 오랜 슬픔은 미온수로만 씻겨진다고

by 양율




세상엔 미운 일들이 많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들보다 미운 일이 더 우리를 많이, 더 오래 사로잡습니다.


사랑은 허약체질입니다. 길이도 짧고요 체력도 약합니다. 사랑은 눈부시게 쓰여지지만 다른 페이지들로 빨리 대체됩니다. 미움은 사랑이 있던 자리를 자주 탐내곤 합니다. 사람에게 이별이 잦은 이유입니다. 미움이 사랑을 이겨 헤어지는 처지가 각박합니다. 하여 세상과 사귀는 사정이 이런 것인가 마음의 일몰에 한 참이나 애석한 노을이 지곤 합니다.


이참에 제 누추한 어법에 오래된 단어 하나를 섭외해 오려합니다. ‘감사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푹신푹신한 이불 같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뱉으면 묘한 진동으로 입술 끝이 겸손하고 풍요로워집니다. 입안이 가득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오래되었지만 유통기한은 우주의 끝까지 일지도 몰라 참 내가 멋있어지는 말입니다.


익숙하다는 말을 대신하여 쑥스럽다는 낯가림을 대리하여 감사하다는 말로 한번 삶을 작곡해 보이고 싶습니다.


어디서부터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느닷없는 고백입니다. 세상에게 장미를 한 줌 건네며 해보는 말입니다.


여행을 했다 돌아오면 서울이 멀뚱멀뚱 여전히 내 누울 곳을 빌려주는 것이 감사합니다. "615"라는 가수의 노래가 세상에 발명된 것에 감사하구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떳떳이 존재해내고 있는 일이 새삼스레 고맙습니다. 내가 웃을 수 있게 정성스레 지은 농담이 고맙습니다. 마른 겨울에 촉촉한 봄을 기다려보는 낭만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헤아려보니 먼지 쌓여 묵혀온 감사함이 많은 세월 외면받아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난 얼마나 멋없이 살았나 싶습니다. 갑작스레 매사에 감사하여 보니 가칫한 세월 바라지해온 어머니에 막연한 죄책감을 갖는 것과 같이 마음 구석구석이 아립니다. 내 속에 미움이 유행했던 탓입니다.


고마워하는 것은 행복의 전원 스위치를 켜보는 일 같습니다. 내가 살아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살아갈 수 있음에 기쁩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행운이 따른다면 앞으로도 몇 번은 같이 밥을 먹을 날이 있길 바랍니다.


미워해야 할 일을 책상에서 치워놓고 거기에 감사함을 몇 개 뿌려 놓으니 여기가 은하수가 아닌가 싶어 몇 번을 웃어보았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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