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게, 따뜻하게

상수. 소박한이야기. 미소라멘.

by Gozetto

누구나 자신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취향이든, 취미든, 특기든 뭐가 됐든 간에 어딘가 자신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처럼 자기 영역을 드러내고 유지하려면 어쨌든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 앞서는 순간 자신의 영역이 모두에게 인정 받는다는 기분이 드니 약하든 강하든 앞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 보다 앞서면 자기 영역을 유지할 수 있지만 앞서 나가면 이미 그만큼 나아간 타인과 다시 경쟁해야 한다. 앞서 나가는 순간 피곤한 경쟁의 늪에 빠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 지키고자 했던 영역조차도 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저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인데 그 작은 마음을 달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최근 5년 동안 겨울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음식은 라멘이다. 어느 순간 한국의 힙하다는 거리에는 그 거리의 대표 라멘집이 있다. 한국의 원조 힙 스트리트라 할 수 있는 홍대 거리에만 라멘을 메인으로 하는 식당이 골목마다 숨어 있고 홍대 거리를 연남동과 합정‧상수 일대로 확장하면 라멘 식당만 수십 곳이다. 라멘 순례를 한다면 사실상 홍대 일대를 다 돌아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이렇게 매년 라멘 시장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커지다 보니 '이걸 언제 다 돌아보나?'하는 낙담이 고개를 들지만 동시에 '어떤 라멘이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기대감도 함께 고개를 든다. 사실 낙담보다는 기대감이 더 크다. 한국 라멘 시장 초창기가 돈코츠 라멘 일색이었다면 최근에는 더욱 다양한 라멘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 뼈를 푹 고아 기본 육수를 뽑아내는 돈코츠 라멘은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라멘이긴 하다. 평범한 살코기부터 시작해 껍떼기, 머릿고기, 내장, 발, 뼈 등 돼지 한 마리를 알뜰살뜰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다 먹는다. 한국인에게 돼지는 너무나 익숙한 식재료인 것이다. 게다가 시장에 나와 있는 라면 종류와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1위인 것만 봐도 한국인들의 면 사랑은 알아줄 만하다. 한국에 비해 돼지의 누린내도 거의 안 나고 심지어 면 요리인 돈코츠 라멘은 익숙하면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인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하고 쉽다는 지점은 돈코츠 라멘의 약점이기도 하다. 돼지 뼈 육수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맛이지만 그만큼 맛의 개성이 강해 다른 육수와 섞어도 돈코츠 특유의 개성을 감추는 것도 쉽지 않다. 어디 돈코츠 육수가 "더 깔끔하고 진한가?"라는 기준외에는 다른 기준이 있기도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돈코츠 라멘이라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라멘은 보기만 해도 설렌다. 미소, 쇼유, 시오를 비롯해 츠케멘, 아부라소바, 마제소바 등. 매력이 각기 다른 라멘들 사이에서 선택 장애에 걸리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다. 식당마다, 베이스가 되는 소스의 종류마다 매력이 너무 다르니 말이다. 특히 일본의 미소는 한국의 된장과 비교해 향과 맛이 부드럽고 담백해 라멘 육수로는 다른 육수들에 비해 맛도 강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부드럽고 든든하며 따뜻하다. 돈코츠 육수가 한일 양국 모두에서 익숙한 육수이기에 쉽게 좋아할 수 있다면 미소 육수는 맛 자체가 접근하기 쉬운 육수이기에 쉽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소 라멘은 어느 곳이든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분이다.

돈코츠만큼 진하지 않더라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미소 육수는 하룻동안 이미 지치고 추운 겨울 바람으로 얼어버린 몸을 천천히 녹여준다. 그 와중에 다른 재료들은 자기들의 매력을 쉽게 뽐낸다. 멘마는 꼬들꼬들한 식감과 짭쪼름한 맛을, 숙주는 아삭한 식감과 시원한 맛을, 스지는 사르르 녹아버리는 부드러움과 고소한 맛을, 항정살 차슈는 부드러움 속에 쫀득한 식감을 숨긴 채 고소한 맛을 입 안을 가득 채운다. 특히 초록의 유채잎은 초록색이 주는 싱그러운 느낌이 향과 맛으로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다. 유채향이 끝 맛에서 서서히 올라오며 향긋한 단맛이 나는 듯하다. 유자 청후추는 일반 후추와 달리 유자 향이 나는 가운데 뒤를 톡하고 맵게 쏜다. 마지막을 부드러움과 고소함으로 무장한 반숙란으로 입 안을 가득 채우면 다양한 매력이 한 데 모인 미소 라멘 한 그릇이 어느 새 비어있다.

이렇게 다양한 맛과 식감이 모두 살아서 서로를 뽐내는 와중에 미소 육수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묵묵히 자기 영역을 유지하면서 모두를 포용한다. 네 맛도 옳고 네 맛도 옳다. 네 식감이 그러하면 네 식감은 이러하다. 굳이 다른 고명들의 맛과 식감을 덮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매력 자체를 모두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며 다른 고명들과 한데 어우러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영역을 소박하게 유지할 뿐 굳이 다른 고명들을 앞서지 않으니 한 그릇임에도 온갖 매력이 가득한 종합 선물이면서도 뭐 하나 버려지는 것 없이 정갈하고 깔끔하다. 싸우지 않고 다른 존재자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자기 영역을 지키는 방법이다.


날씨가 완연히 겨울이다. 바람만 찬 게 아니라 공기까지도 차다. 추위를 이겨내고자 내복을 꺼내 입고 롱패딩으로 단단히 무장해도 홀로 거리를 걷는 것은 잠시 따뜻할 뿐 금방 추위에 몸을 떨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영역을 단단히 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해 이기면 잠시 기분은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금방 수많은 다른 사람과 무한히 경쟁해야 하며 어느 순간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안고 살아간다. 묵묵히 자기 자신의 영역을 단단히 하되 그 영역으로 들어오는 타인을 환대하며 함께 즐길 줄 아는 포용력. 타인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함께 즐길 줄 아는 여유. 미소 라멘은 한 그릇이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여유가 있다. 화려한 것은 즐겁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소박하더라도 묵묵하게 나아간다면 결국 오래도록 따뜻하고 즐겁지 아니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