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 선물인 것 같은데 조그만 게 하도 비싸길래 뭐 이런 걸 사줬나, 돈으로 주지 그런 생각하다가. 나도 옛날에는 이런 거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하고..
B : 저도 몇 년 됐어요. '돈으로 주지..' 하는 거. 그거 하트가 없어져서 그런 거래요. 마음속에 하트 모양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죄다 돈 모양으로 바뀐 거라고...
듣자마자 메모해 두었던 드라마 <인간실격>에 나온 대사이다.
막 서른 살이 된 우리가 오늘 나눴던 대화와 닮아 있다. 중학교 때부터 절친한 16년 지기 친구들과 새해가 되어서는 처음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 술이 곁든 저녁도 신나는 토요일도 아닌, 적당한 여유와 다소 낮은 텐션으로 만난 일요일 낮이라 그런지 매우 현실적인 토크들이 오고 갔다. 한때 수천 가지 낭만을 함께 공유해 왔던 친구들이기에, 낭만은 버리고 현실로 채운 대화들은 차갑지만 뜨거웠다.
(1) 집은 어디에 구할 거야?
서울에 살던 사람은, 경기에서 회사까지 광역 버스 타고 1.5 ~ 2시간이 익숙한 사람에게 맞추기 힘들다. 경기에 살던 사람은, 굳이 서울로 이사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둘의 통근시간을 최소한 지금과 같게 하면서, 다른 조건들도 적당히 충족시키는 집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우리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돈이 많을수록 선택의 폭은 넓어지고, 고민의 시간은 짧아진다. 회사 과장님들이 결혼 준비하면서 집 보러 다닐 때 한 번씩은 꼭 운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차가운 현실에 부딪히면서 작아지는 자기 자신에 서러워서.
(2) 하객은 몇 명이나 부를 거야?
리스트를 다 적어본다. 쉬는 날 기꺼이 와서 축하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의 결혼식에 기꺼이 가줄 것임을 고려한 리스트. 2~30명 남짓한 리스트에 '너무 적은가?' 싶다가도 괜히 애매한 사이에 손을 벌리느니 이 사람들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곧 '인간관계, 이대로 괜찮은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3) 부모님한테 얼마나 지원받아?
충분히 지원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 절대 지원받지 않고 스스로 해나가겠다는 사람. 그럼으로써 부모의 간섭을 최대한 차단하고 부부가 모든 선택을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의지. 이런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못 봤다. 통상 가능한 만큼 최대한 받겠다는 사람들. 또는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4) 식장, 드레스, 촬영은?
디테일 한 끗 차이에 추가 비용이 든단다. 사진만 봐서는 무슨 차이인가 싶은데, 실물로 보면 가격에 따라 디테일과 퀄리티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비싼 건 비싼 값 한다. 생에 1번이니까 제일 좋은 걸로 하고 싶다가도,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나 싶다.
(1) 굳이 여기서 더 에너지 쓰고 싶지 않더라
시간, 돈, 에너지의 한계를 이유로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SNS나 카카오톡 프로필 업데이트를 보면 종종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면서도, '굳이' 먼저 연락하는 열정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메신저는 한 번 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밥 한 번 먹자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 점점 좁아지는 관계지만, 그럼에도 굳이 아쉽지 않은. 갈수록 우리에게 얼마 안 남을 자원들을 한곳에 집중하자는.
(2) 그래도 오랜만에 연락 오면 반갑고 좋긴 해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내가 조금만 용기내고 정을 발휘하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잠깐의 즐거움이 될 수 있는데. 만나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연락이라도 먼저 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정겹게 살아갈 수 있는 건데.
(3) 너무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닐까
또 위와 별개로, 만나는 사람만 만나다 보니 시야가 제한되는 우려도 있다. 매번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가치관, 비슷한 환경. 그래서 어떤 새로움을 통해 얻는 인사이트나 에너지가 결여된다.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4) 공감대 많고 좋지 뭐
하지만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면 매번 공감대가 많아서 좋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알아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말이다. 애써서 부연설명 할 필요도 없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서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들을 하나둘 포기하고,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곳이 아니라,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야 하는 곳. 회사는 꿈을 펼치는 곳이 아니라 돈 버는 곳. 아쉬운 자아실현은 퇴근 후에 회사 밖에서 하자.
항상 삶에서 가장 큰 화두인 일, 연애(결혼), 인간관계로 비추어 보건대 우리는 지금 정확히 낭만과 현실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서른 살이 되면서 조금은 더 현실 쪽으로 기울게 된 것 같지만... 결국엔 다 돈인가 싶다가도.. 하트를 다 잃고 싶진 않은 마음. 의지가 다하는 데까지 낭만도 오래 데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