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예술이라는 수채화

뮤지컬 <라흐헤스트>를 보고

by 북두칠성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아."

남편 환기를 떠나보낸 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는 향안의 나지막하지만 인생의 무게가 담긴 한마디로 극은 시작된다. 그녀의 손짓대로 투박하고 옛스러운 벽면이 영롱한 빛깔로 물드는 순간, 관객은 한 여성이 살아온 다채로운 인생이라는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역순행과 순행이 교차하는 사랑의 기하학

뮤지컬 <라흐 헤스트>의 구조는 매우 섬세하다. 삶의 끝자락에서 남편의 그림과 함께 예술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 '향안'의 삶은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행적 구조로 그려내며, 부끄러움 많던 청춘 '동림'과 '이상'의 삶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앞으로 한 발씩 내딛는 순행적 구조로 그려낸다.


순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 맞닿는 순간,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던 네 명의 인물이 무대 위 교차로에서 함께 노래하는 연출은 전율을 선사한다. 남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짙은 관계성은 문, 책장, 다리라는 단촐한 무대 구성을 넘어 관객의 심상 속에 거대한 은하수를 그려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윤석원 배우가 연기한 환기는 듬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향안의 세계를 감싸 안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시 구절이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고, 벽면이 별 가득한 푸른 밤하늘로 물들 때, 나는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아까워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의 열정을 마주했다. 늘 안 되는 이유와 핑계를 찾으며 주저했던 나의 삶이 예술의 순수함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임찬민 배우의 동림은 당차고 서툰 소녀의 면모로 이상의 소심함을 견인했다. 기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야만 간신히 만날 수 있는 사랑, 잠깐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예술가와의 사랑은 가혹했다. 하지만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낸 동림의 슬픔은, 훗날의 향안이 되어 비로소 완성된다.


동림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는 삶의 오작교

극의 마지막, 홀로 남겨진 어린 동림을 향안이 안아주며 "너는 아직 어리니 다시 힘을 내 살아가야 한다"고 위로하는 장면은 이 극의 백미다. 향안이 환기를 만나 자신을 다시 '동림'이라 소개할 때, 관객은 깨닫는다. 그들의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과 예술이라는 오작교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었음을. 미래를 알면서도 계속 걸어가라고 과거의 자신을 다독이는 향안과, 그런 향안의 조언대로 다시 힘을 내어 예술가를 사랑하며 앞으로 나아갈 동림의 모습. 그리고 다시 한 번 네 명의 배우가 부르는 4중창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예술가와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일이지만, 그 고통조차 예술로 남을 때 비극은 숭고함으로 승화된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믿게 된다.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들의 용기와 희생과 예술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고, 그들의 삶은 밤하늘의 찰랑거리는 은하수 조각이 되어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마다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고, 그 예술은 다시 우리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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