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위한 비극, 고통 속에 피어난 헌신과 사랑

연극 <킬 미 나우>를 보고

by 북두칠성

‘킬 미 나우(Kill Me Now)’.

직역하면 나를 지금 죽여달라는 이 적나라하고 섬뜩한 말은, 작중 주인공 조이가 즐겨 하던 게임 속 대사다. 좀비에게 물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기 전, 괴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기를 택하는 캐릭터들의 마지막 선택. 그러나 이 가상 세계의 대사는 극 후반부, 제이크와 조이 부자(父子)에게 닥친 비극적 현실과 맞물리며 객석의 심장을 가장 무겁고 아프게 짓누른다.


주체성이 소멸된 삶, 그 고통에 대한 응답

촉망받는 작가였던 제이크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아들 조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부와 명예를 포기했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는 욕조 속에서 아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사력을 다해 아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크에게 찾아온 전신 마비라는 불치병은 평온해 보이던 가족의 삶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극에서 가장 가슴 시린 대목은 조이가 아빠의 '안락사'를 제안하는 장면이다.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야!"라는 조이의 외침은 잔인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제이크를 향한 가장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조이만이, 주체성이 완전히 소멸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제이크의 절망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이가 더 이상 투정 부리는 아이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한여름 밤의 꿈과 차디찬 현실의 대비

조이의 졸업식 전날 보여준 두 사람의 상상은 비극을 더욱 극대화한다.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베개 싸움을 하며 장난치는 아빠와 아들. 흔히 '평범한 행복'이 그들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관객은 숨이 막히는 슬픔을 마주한다. 곧이어 돌아온 현실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에 수치심을 느낀 제이크는 비로소 삶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든 병원에 가서 생애를 이어가자는 트와일라의 울부짖음, 조이에게 자신을 씻겨달라는 제이크의 의미심장한 발언,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씻겨주겠다고 울먹이는 조이의 표정까지. 각자의 입장을 가진 모든 인물들의 감정과, 평범한 꿈 뒤에 배치된 이 냉담한 현실의 연출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보편적 불행이 던지는 지독한 통증

<킬 미 나우>가 슬픔을 넘어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 불행이 지독하리만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건실했던 제이크가 우연히 찾아온 질병으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듯,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떤 보통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게 되고 존엄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여실히 보여준다. 제이크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불확실한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나는 공연을 보며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편임에도, 엔딩 장면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아빠를 부르짖는 조이의 애처로운 목소리, 애써 잡으려 해도 자꾸만 흘러내려 욕조 물을 찰랑이게 하던 제이크의 손. 그리고 터져나오는 감정을 참지 못해 한참 동안 극장에 울려퍼지는 조이의 울음소리. 그 광경을 마주한 순간, 나는 심장이 베여 피를 토해내듯 울음을 뱉어내야 했다.


떠난 이에게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

'가족'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견뎌온 아버지의 헌신은, 늘 아들을 씻기던 그 욕조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제는 주체와 객체가 바뀌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아들의 품에서 그는 잠이 든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극적 방법이었다.


조이는 아버지의 희생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슬픔을 털어내고 남겨진 이들과 함께 '사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떠난 이에게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이며, 인간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방식이다.

작가의 이전글삶이라는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예술이라는 수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