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는 서른살 스타트업 라이프를 시작하며 어느 날 찾아온 번아웃, 그리고 2년 만에 스스로에게 내린 진단과 처방에 대한 글을 짧게 기록했어요. 오늘은 몸과 마음의 신호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 번아웃 극복을 위한 여정, 그리고 삶을 더 단단하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저만의 리추얼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단계. 몸의 신호
몸에 염증이 줄어들지 않았고, 피부염을 앓았으며, 종종 턱 근육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증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을 때엔 가슴이 뻐근하게 답답하기도 했다. 정말 신기한 것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그냥 잠을 못자서 그래.',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 내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하고 외면했다. 아무리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지만, 계속 잠에 들고 싶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된 신혼부부의 저녁을 떠올리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오손도손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며 맛있는 밥을 먹고 함께 산책을 나가는 그런 모습이라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누워서 쉬기 바빴던 것 같다. 인스타 세상에서 활기차고, 성실하게, 꾸준히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설픈 시기와 동경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심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에 SNS 활동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되어 독이될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한다.
2단계. 마음의 신호
그렇게 부부 사이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이 바쁘니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고객과 대화를 해야하는 세일즈 직무를 맡고있다. 사내 멤버 또는 외부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몇 개인지 세어보았다. 전화, 이메일, 채널톡, 메신저, 문자, 카카오톡, 직접 대화까지 7개 정도 되었다. 한 달에 맡는 고객과의 상담량을 세어보았다. 약 128건 정도 되었다. 한 사람이 128명과의 고객과 7개 정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대화하고 있던 것이다. 공중으로 떠다니는 말들을 묶어 글로 정리하고, 그들이 필요로하는 서비스를 제안하는 일에는 꽤나 큰 정신적, 신체척 에너지가 요구되었다.
퇴근길은 정말 말 그대로 넉다운이 되어서 돌아왔다. 남편과 오롯이 보내는 저녁 식사에서는 서로의 일상에 대해 대화를 나눴지만, 사실 속마음으로 '아, 그냥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밥먹는 데 집중하고 싶다'였다. 남편에게 이 말을 꺼내면 분명 상처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3단계. 문제 인식
남편, 주변 지인, 회사 동료들이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늘 피곤해보인다는 말을 했고, 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니 직장 동료들도 선뜻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사교적이고, 먼저 인사를 잘 건네던 내 모습과는 딴판인 자아가 생긴 것 같았다. 가까운 동료는 나에게 심리 상담을 권했다. 고민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힘듦의 원인은 나 또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찾아야하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나를 둘러싼 외부환경에서 문제를 찾는다면, 그 환경을 바꾸거나(거의 불가한 일이다.) 내가 그 환경을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될 것이다. 퇴사가 답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업무의 강도가 셌지만, 야근을 할 만큼 시간을 통제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내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회사 외의 일상이 나의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 삶의 동력이 될 자양분이 일상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위에 언급한 남편과의 저녁 식사 사건(?)이 컸다.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고, 제발 조용히 있길 바랬던 순간을 알아차린 그 날 말이다.
4단계. 해결책 찾기 : 기록에서 답을 찾다.
주변 지인들도 잘 만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나를 잘 이해하는 가까운 지인에게 나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과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가 와인 한 잔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 책 한권을 추천받았다. 스몰스텝(박요철 저. @aiross)이라는 책이었다. 가볍게 읽기 시작해 나를 조금씩 바꿔놓은 책이다. 일상 생활에서 나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하고 매일 기꺼이, 지속할 수 있는 행동들을 스스로 정하는 연습을 도와주었다. 실천 방법은 크게 세 줄 일기 쓰기와 스몰스텝 트래커로 설명할 수 있다.
짧고 간결한 세 줄 일기 쓰기
✔ 어제의 안좋았던 일
✔ 어제의 좋았던 일
✔ 오늘의 또는 내일의 다짐(목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나의 모습과 태도가 어땠으면 좋겠는지 기록한다. 처음엔 이게 도움이 될까? 싶었다. 몇 주 간 적어놓은 기록을 보니 내가 어떤 자극에서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날에 기록도 남기지 않을 만큼 방전이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기록의 양에는 기준이 없으므로, 본인이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된다. 나같은 경우에는 세줄 일기를 쓰고, 남은 공간에 나의 고민이나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적었다. 지금은 고민이나 아이디어가 차지하는 공간이 더 클 정도다.
매일 10분 내에 실천할 수 있는 스몰스텝 체크하기 (해빗트래커)
✔ 매일 실천하고픈 항목들을 적는다. 나의 경우 취미, 건강, 기분 전환을 위한 카테고리로 나눴다.
✔ 실천한 스몰스텝에 체크를 하되, 실천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X표기를 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 거창한 목표 달성이 아닌 작은 성취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목적으로 활용한다.
산책, 명상, 요가, 책 읽기, 음악 듣기, 일기 쓰기 등 10분 내로 가볍게 실천할 수 있는 활동들을 하나씩 늘려갔다. 몇 주 째 실행하지 않고 있다면, 과감하게 폐기한다. 아직은 당장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조금씩 훈련이 된 다음 다시 도전하는 것도 건강한 방법이다. 모든 과정은 날 위한 것이므로 누군가에게 강요받거나 보여줄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삶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신에게 인색하지 않도록 다정함을 발휘해야 한다.
5단계. 나만의 작은 의식, 리추얼
세 달 정도스몰스텝을 실천했다. 꾸준히 무언가 기록해본 경험은 꽤나 큰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이 성취감은 의미가 있다. 기록을 잠시 멈추거나, 해빗트래커에 동그라미가 없더라도 괜찮았다.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나의 어제와 오늘을 마주하며 써내려간 것이므로 그 마저도 스몰스텝의 과정인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몰스텝을 실천하기 전과 비교해 단 10~20분 조금 더 일찍 일어났을 뿐인데, 작은 의식(세 줄 일기 또는 독서)이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바로 컴퓨터를 키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통화하기 바빴던 이전과 달리, 조금 더 일찍 도착해 커피나 차를 한 잔 마시며 재즈 한 곡을 듣고, 오늘의 할 일을 체크한 후 업무를 시작한다. 점심 시간에는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10분 정도 걷고 돌아와 해빗트래커에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업무 시간은 똑같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박자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작은 의식을 통해 하루의 주인이 되고나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나의 생산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마음의 조급함이었음을.
스몰스텝으로 갖게된 자신감과 행동력은 자연스럽게 함께 할 누군가를 찾게되었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목적보다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은 의식(즉, 리추얼)을 찾는 이들과 긴 호흡으로 이어가고 싶었다. 여러 활동을 탐색하다 밑미의 리추얼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었는데, 꽤 오랜시간 마음속으로 지켜봐온 작가 무과수(@muguasu)님이 메이커로 활동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식사 일기를 주제로 진행되는 3주 간의 활동. 이거다 싶었다. 어릴적부터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다. 요리와 식사의 기록이 나에게 가져다 줄 작은 변화가 기대됐다.
약 2달 간 리추얼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행복을 공유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자신만의 리추얼을 꾸려갔다. 활동이 끝날 무렵에는 리추얼 멤버들과 피크닉을 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고민, 결심, 위로 등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친구와도 잘 나누지 않던 소재로 낯선이와 유대감 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기에, 정신적 지지를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기도 했다. SNS 세상 속에서 비슷한 사람과 소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위로를 받는 것도 비슷한 이치 아닐까. 자신의 삶을 거창하지 않은 방법으로, 단단하게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 무과수님과의 만남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도 누군가를 응원하듯, 나 또한 그녀를 응원한다.
의식적으로 3개월 동안 식사를 대하는 나의 감정과 감각에 대해 기록을 남기다 문득, 이제 다른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 시점부터 브런치에 글을 기록하고 있고, 더 나아가 2년 만에 운동을 시작했다. 수영을 주 3회 배우고 있는데 훗날 멋있게 바다 수영을 하게될 나의 모습이 기대된다. 이 모든 것들을 하루 아침에 시작하려고 했다면? 장담하건대, 처절하게 실패했을 것이고, 회복하고 다시 도전하는 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지쳐 쓰러져있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스스로 작은 언덕을 넘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 다음에야 지금보다 더 높은 동산을, 거친 산을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나요?"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진 않다."고 대답할 것 같다. 삶을 더 풍요롭고, 단단하게 만드는 작은 습관과 리추얼이라는 게 마법처럼 180도 다른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다면 너무 큰 요행을 바라는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자주 무너지고, 다시금 일어선다. 내가 생각하는 리추얼이란, 넘어지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 단단해지기 위해 되려 유연한 태도로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