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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와 밍기뉴 Aug 11. 2023

무작정 반차를 냈습니다.

매서운 태풍 카눈이 지나간 자리, 잔잔해진 빗줄기를 보며 문득 글을 씁니다.



직장인이 평균적으로 갖게 되는 연차 15일, 2023년의 절반 이상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9일이나 남았다. 틈틈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가늠했던  것보단 더 남아있던 것이다.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아서일까?


누군가는 8월에 휴가를 떠나지만 나는 더운 날의 여행을 선호하지 않았다.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단 여름 방학 시기에 교육을 운영해야 하는 일을 맡았기에 떠나지 못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수 있겠다. 그렇게 나는 늦은 9월의 휴가를 즐기곤 했다.


몇 년 후, 직장을 옮기고도 여름휴가를 여름에 간 적이 없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이 부대끼는 곳에서 비싼 값을 치르며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열심히 돈 벌어 돈 쓰러 가는데 그 과정마저 고생스럽긴 싫었을 테다. 작년 6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굳이 여름휴가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올해 역시 12월 유럽여행 티켓을 끊어놓고 나니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절약하고자 생략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간을 못쓰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 예를 들어 은행 업무나 병원과 같은 일정이 껴있지 않은 이상 잘 쉬지 않았다. 그리고 쉰다고 하면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데 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는 주말에도 함께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꼭 시간을 같이 보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오늘은 그저 나를 위한 반나절을 보기로.


막상 비 오는 대낮에 혼자 시간을 보내려니 뭘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 문 밖을 나서기 전 친구에게 카톡으로 갈만한 곳들을 추천받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이전에 가보고 싶었던 (그러나 금방 기억 속에서 잊혀버린) 카페와 독립 서점 방문 후기를 읽었다. 그래, 오늘은 경복궁이다! 근데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찾아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던가?


자주 찾는 식당, 골목이 없으면 마치 이방인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는 서울 시민의 삶. 누군가의 후기, 지도에 의존해야만 갈 곳을 찾을 수 있다니 씁쓸했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듯싶다. SNS로 정보를 접하고, 다른 사람의 평을 토대로 최대한의 리스크를 없애려는 효율성을 끔찍하게 아끼는 현대인이라면 말이다. 그저 떠나보고 겪어보는 일들에 극도로 인색해지지 말자.



비가 보슬보슬 잦아든 오후 2시, 경복궁 골목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동네의 모습이 떠오르는 풍경.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떠올라 잔잔한 웃음이 났다.


가장 도시다운 서울에 남겨진 역사와 문화가 깃든 것들을 보며, 마치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은 잠시 가방에 넣어두고 한적한 거리를 한참 걸었다.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마련해 오늘 구매한 책의 목차를 훑고, 바로 노트북을 켜 기록을 한다. 현재 시간 3시 52분, 단 1시간 동안의 나의 걸음과 모든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를 잘 쓰고,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푸릇한 만물이 돋아나는 여름, 조금 더 길어진 하루하루를 잘 쓰고, 잘 쉬고 돌아와 저무는 가을과 겨울을 잘 보내기 위해 여름휴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고스럽고, 효율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떠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혼자만의 쉼을 가져야만 다른 이들과도 잘 어우러지는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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