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봉순이 언니>를 읽고
<봉순이 언니>를 읽기 전까지, 나는 공지영 작가의 책이 어렵고 무거울 거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멀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첫 문단부터 나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첫 문단, 엄마와의 전화를 끊은 후 어른이 된 짱아가 창가에 앉아 있는 장면은 그저 풍경의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햇살과 오래된 전화기 버튼 사이에 낀 먼지가 눈에 들어오면서, 작가는 너무도 정적이고 미세한 순간을 통해 이 소설의 분위기와 관계의 결을 은유처럼 보여준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창가의 탁자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창은 남쪽으로 나 있어서 초봄의 까실까실한 햇살이 아침부터 낡은 커튼의 올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전화기 번호판 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에 낀 오래된 먼지들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1하고 2 사이 2하고 3 사이……. 다만, 4하고 1 사이, 그리고 2하고 1 사이, 8하고 9 사이의 모서리들만 그 먼지들로부터 희미하게 벗어나 있었다. 4하고 1 사이하고 8하고 9 사이하고는 아마도 부모님 댁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위해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이 문단 하나만으로,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되리란 예감을 했다.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자주 눌러 생긴 ‘먼지 없는’ 틈, 그리고 햇살에 드러난 오래된 자국들. 이 장면은 가족과의 관계, 삶의 층위, 그리고 봉순이 언니라는 인물을 바라보게 될 시선을 예고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들었던 외갓집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시작한 엄마의 친구. 그 친구 대신, 일한 집에서 받은 돈을 친구의 부모님께 전해줬다는 엄마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도 봉순이 언니가 있었고, 나는 그 얼굴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에게서 버려져 남의 집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자신도 어리면서 짱아를 돌보며 성장한 봉순이 언니. 그녀는 짱아네와 가족이 되고 싶어 했지만, 짱아 엄마는 끝내 그 선을 허물지 않았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을 꿈꾸었고, 가정을 꾸리고자 애썼다. 나는 그녀의 삶을 보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떠올렸다. 프롬은 인간이 고립을 견디지 못하고 타인과의 결합을 갈망한다고 말한다. 봉순이 언니의 반복되는 사랑과 좌절,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라는 바람은 바로 이 고립과 결핍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끝내 그녀는 경계 밖의 인물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전화기 버튼 사이에 낀 먼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햇살이 들어올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흔하고 특별하지 않아 잊히기 쉽지만, 그 안에야말로 삶의 진실이 숨어 있다. 짱아의 기억 속에서 봉순이 언니는 그렇게 비로소 ‘보이는 존재’가 된다.
가장 나를 깊이 흔든 장면은 봉순이 언니가 다이아 반지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너무나 쉽게 떠올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다음 문장, 작가가 던지는 문장에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알아야 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 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 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나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봉순이 언니가 다이아 반지를 훔쳤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렸던 나는, 이미 내 안에 ‘그럴 법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반지가 지푸라기 더미에서 발견되고, 그것이 귀중품인지조차 몰랐다는 어린 식모의 반응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안의 편견이 얼마나 쉽게 작동했는지를 깨달았고, 그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책을 덮고 나니, 더는 봉순이 언니를 과거의 인물로만 여길 수 없었다. ‘식모’라는 단어는 사라졌지만, 그와 같은 삶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형태로, 누군가의 통제 아래 살아가는 존재들은 여전히 있다.
가정부, 보모, 가사노동자들, 이주 여성들. 그들 또한 여전히 햇살이 비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시대에,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을까? 그들에게도 봉순이 언니처럼 작은 희망이 있을까?
그들 역시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 희망이 누군가의 기억과 시선 속에서 반짝이기를.
잊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중받기를.
햇살이 먼지를 비출 때야 비로소 드러나듯,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이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