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의 소설 <파과>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연히 이 이야기의 중심은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노년의 여성 킬러라는 파격적인 설정, 날카롭고 무감한 그녀의 삶은 강렬했고, 그만큼 독자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시점부터 나는 조각이 아닌 ‘투우’를 따라가고 있었다. 조각의 시선으로 투우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조각을 통해 투우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전환점은 투우의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했던 어린아이, 심지어 그 죽음을 가져온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아이. 그 아이가 기억한 건, 자신의 알약을 절구로 빻아 주던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조용히 해주던 사람—조각이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떠나는 조각을 멍하니 보며 투우가 그 순간 부서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 아이는, 그날 이후 점차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점점 <파과>라는 제목이 투우를 가리키고 있다고 느꼈다. 흠집 난 과실, 부서진 과일. 그날 이후 망가진 삶 속에서, 그는 결국 조각처럼 킬러가 되어버린다. 그 길은 분명 투우가 선택한 것이지만, 그 선택에 조각이라는 존재의 영향이 없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 나간 중요한 '조각'을 다시 채우기 위해 조각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정체성의 근원을 마주하기 위해 그녀를 찾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시 만난 조각은 과거의 완벽한 ‘손톱’이 아니었다. 나이 들고, 약해지고, 개를 돌보며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더 이상 냉혹하지 않은 사람. 투우에게 그 모습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부서지게 만든 완벽한 그녀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 것은 흠집 나고 초라한 과실 같았으니까.
내가 본 투우는 분노했고, 상처받았고, 외로웠다. 이제 세상에 진짜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는데, 정작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강박사에게 향한 그녀의 시선에 얼마나 화가 났을까.
투우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각은 끝까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한다.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다. 투우가 살아온 전부는 결국 조각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세상에서 그의 존재는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조각이 잠시 자기를 알아보는 듯한 말을 하자, 투우는 순간 반응한다. 그 순간, 투우는 기쁘지 않았을까? 마침내 자신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얻은 것처럼.
하지만 조각은 다시 말을 얼버무리고, 그는 결국 끝까지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 직후 조각의 말, 그 한마디는 조각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왜 그 말을, 그가 살아 있을 때 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도 바라던 그 한마디를 죽은 뒤에야 꺼냈을까.
강박사의 딸을 납치한 복수였을까. 벌이었을까.
혹은 그냥, 너무 늦은 용기였을까.
책은 이후에도 조각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지만, 나에게 <파과>는 투우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투우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도 싫었다. 차라리 조각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 채로 끝났다면, 그게 덜 아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파과>는 결국 흠집 난 존재들의 이야기다. 조각, 투우, 류. 그들은 모두가 조금씩 부서져 있었고, 그 부서진 채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투우의 부서짐이 가장 깊고 고독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조각의 이야기가 아닌,
투우의 삶을 그린 이야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