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하얀 성>을 읽고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10년 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이 글을 쓴 사람이 화자인가, 호자인가’를 맞추기에만 몰두했고, 그 여정이 담고 있는 더 깊은 의미에는 다다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한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는 안다. 이 이야기는 누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파묵은 애초에 그런 해답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는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흐트러뜨리고, 독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묻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한복판에, 책 제목이자 상징인 ‘하얀 성’이 있다.
내게 ‘하얀 성’은 도달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꿈처럼 아득한,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성은 곧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길’의 은유로 다가왔다. 소설 속 묘사처럼, 어딘가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가 열릴 것 같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곳.
파묵은 우리가 살아가며 계속해서 묻게 되는 존재의 질문—나는 누구인지, 왜 나인지—그 끝에 있는 이상향 같은 장소로 ‘하얀 성’을 그려낸다.
화자와 호자는 처음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경멸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책상 앞에 마주 앉아 각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것을 상대에게 읽어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점점 닮아간다. 그 장면을 보며, 이건 단순한 지식의 교환이 아닌 기억과 정체성의 나눔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타인을 마주 보며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 안의 무언가를 열어 상대에게 건네는 행위다.
더 나아가, 화자와 호자에게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얼굴이 마치 ‘거울’ 속 나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나를 정면으로 볼 수 없지만, 앞에 앉은 그의 얼굴에서 나의 익숙한 모습을 보듯이. 타인을 통해서만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파묵은 이렇게 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와 호자는 함께하는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경계도 서서히 무너진다. 하지만 이 정체성의 교환은 단지 심리적인 혼란만이 아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문명적 기반 위에 서 있는 존재다. 한 명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체화했고, 다른 한 명은 오스만 제국의 동양적 세계 안에 있다.
이들이 갈망한 것은 단지 서로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세계와 문명 자체였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 나눠준 것보다 나눔 받은 것의 무게가 더 커져버렸다. 내가 갖지 못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는 내 안에 더 깊고 넓게 뿌리내리게 된다.
결국 화자는 오스만 제국의 천문학자이자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고, 호자는 이탈리아로 떠난다. 이들은 서로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한 듯 보이지만, 나는 이것을 단순한 위치의 뒤바뀜이나 역할 교환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했고, 그렇게 각자의 ‘하얀 성’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하얀 성’은 더 이상 도달해야 할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갈망하고 질문해야 할 내면의 상태, 존재의 방향이다.
나의 ‘하얀 성’은 여전히 찬란하고 새하얗다. 그 위로 아직 지는 해의 붉은빛은 드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해는 머리 위에 높이 떠 있고, 나는 더 힘차게 그 성을 향해 걸어가야 할 시기에 있다.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 방향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것—그 여정 속에서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