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킴
눈 앞에 파란 불이 켜지면 뛰어가는 사람들.
약속 없는 일요일, 하는 일은 딱 두개다.
목욕탕 가기. 그리고 까페 가서 책 읽거나 다이어리 쓰고 사람 구경하기.
집에서 목욕탕까지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4번은 건너야 한다.
저 앞에 마지막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졌다.
분명히 난 오늘 약속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그 뒤에 일정도 없고,
심지어 2시 30분 밖에 안된 시간인데.
뛰었다.
내 옆에 걷던 모두가 뛰었다.
눈 앞에 파란불이 켜지면 뛰어갈 수 밖에 없는 걸까.
조금 기다렸다가 다음 신호에 건너도 되는데,
굳이 모든 사람이 건너는 타이밍에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버스를 타려고 뛰어갈 때도 같은 생각을 한다.늘.
다음 버스를 타도 될 텐데,
다음 신호에 건너도 될 텐데,
누가 우리를 세상의 속도에 발 맞추라고, 뛰어가게 만드는걸까.
눈 앞에 파란불이 켜지면 뛸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요즘 내 주변에 퇴사 소식과 결혼 소식이 넘쳐난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서 '남미'라는 한 단어밖에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면서 꼭 이루고 싶은 단 한 가지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변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뤄낸다.
나는 겁이 많아서 얼마 되지도 않는 손에 쥔 것들을 꼭 쥐고
오도가도 못하는데,
너무 쉽게 떠나고, 이뤄낸다.
내가 작아지는 날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11월의 11일 이라는 날 들이 어이없게도 참 쉽게 지나갔다.
어제 밤, 구글 맵으로 내가 가고싶던 모든 곳들을 차근차근 돌아다녔다.
쿠바, 남미, 몰타 섬, 벤쿠버, 뉴질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써놓고 보니 70년 동안 못 갈 것도 없겠다 싶다.
안코드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제일 많이 사랑할까?"
내가 지금 당장 다 버리고 세계여행을 간다면,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교환학생 시절 쓰던 일기장을 열어봤다. 난 그 때 울던 기억이 너무 많아서.
나는 지금 당장 다 버리고 세계여행을 떠난다면 매일 울며 보낼 게 뻔하다.
가족이 보고 싶어서, 너무 외로워서.
그러면 내가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일은 다음 신호에 건너도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