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잘못, 다른 분노

by 녀웃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부당함을 감지하는 감각이자,

어떤 가치가 훼손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분노 자체가 문제인 적은 거의 없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는 분노하고 무엇에는 침묵하는가에 있다.


사람은 종종 비슷한 종류의 부당함 앞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하면 이해하고,

멀어진 사람이 하면 규탄한다.


내가 속한 집단이 하면 맥락을 찾고,

다른 집단이 하면 본질을 단정한다.


익숙한 사람의 잘못은 사정이 되고,

낯선 사람의 잘못은 성격이 된다.


같은 행위가

관계와 거리, 호감과 소속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그렇게 분노는 사실보다

위치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분노는

정의의 감각이 아니라

편향의 감각에 가까워진다.


선택적 분노는 낮은 지성을 증명합니다.


이 말은 감정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의 강도가 아니라

분노의 기준을 말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면,

그 판단은 원칙이 아니라

호불호에 가까워진다.


지성은 정보를 많이 아는 능력보다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능력에 가깝다.


내 편에게도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는가,

싫어하는 사람의 옳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분노의 성격이 드러난다.


분노가 가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사람은 누구나 편향을 가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편향이 없다고 믿는 태도가 아니라

편향을 자각하는 태도다.


내가 분노하는 장면과

분노하지 않는 장면을 함께 놓고 보면,

그 사이에 숨어 있는 기준이 보인다.


분노는 옳음의 증거가 아니다.

때로는 애착의 증거이고,

때로는 동일시의 증거이며,

때로는 두려움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분노를 느끼는 순간보다

분노를 선택하는 기준을 돌아보는 순간이

더 중요하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침묵하는가.


그 선택의 지도 위에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려진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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